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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거운 장비를 싣고 달려 가는 소방마차 / 출처 : Pixabay

현대 소방차의 머나먼 조상님,
소방마차

소방차가 사이렌을 울리며 급히 출동하는 광경을 접하면, 어딘가 화재나 재난이 일어나고 있다는 사실을 어렵지 않게 추측할 수 있다. 그런데 약 150년 전, 이와 마찬가지로 사고 현장에 누구보다 먼저 달려가 불 끄는 데 앞장서는 존재가 있었단다. 제대로 닦아놓은 길조차 없었던 시절, 기상천외한 방법으로 전력 질주해 본분을 충실히 해냈다는 역사 속 주인공은 다름 아닌 소방마차다.

자기 전 떠다 둔 물 양동이 두 개에서 소방마차에 이르기까지

1875년에 널리 쓰인 빨간색 소방마차 / 출처 : Wikimedia Commons

갑작스러운 화마의 등장은 어느 시대나 상당히 골칫거리였던 모양이다. 물론, 인명 ‧ 재산 손실을 감수해야 하고 복구에 시간과 비용을 쏟아야 한다는 점에서 개인 손해는 이루 말할 수 없다. 게다가 불이 다른 곳으로 퍼져나간다면 시내를 거의 다 태워버린 고대 로마 대화재처럼 일이 걷잡을 수 없이 커지기 마련이었기에 사회적 차원에서 예방에 나설 필요가 있었다.

1882년형 소방마차 / 출처 : Wikimedia Commons

그러나 오늘날과 같은 소방 조직이나 장비가 없었던 1600년대 초반 미국에선 자기 전에 물을 가득 채운 양동이 두 개를 문 앞에 놓아두는 정도가 최선이었다. 따라서 강이나 하천 등에서 멀리 떨어진 민가는 화재 시 손 써 보지 못하고 전소하기 일쑤였다.

다행히 1648년 뉴욕에서 소방 인력 모집을 거쳐 의용소방대를 처음 창설했고, 1853년엔 오하이오주 신시내티가 최초로 전문직 소방관을 채용하며 체계는 점차 자리 잡기 시작했다. 아울러 1870년엔 드디어 물탱크 장착 마차를 도입해 적극적인 진압에 나설 수 있었다.

출동 알람에 맞춰 준비하는 소방마…체력은 물론 성품까지 우수해야 선발

두세 마리가 한 팀으로 출동한 소방마 / 출처 : Pixabay

이후 1920년까지 50년간은 곧 소방마차의 전성기였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지역 소방서마다 필수로 갖춘 마구간의 옆이나 뒤엔 언제든 말을 꺼내 합체할 수 있게 장비가 대기하고 있었다. 여담으로, 매사추세츠 소방관이었던 찰스 E. 베리(Charles E. Berry)는 이러한 불편을 해소하고자 1873년 신속 정확한 잠금장치가 달린 마구를 개발해 큰 호평을 받았고, 결국 사직한 다음 특허 취득과 판매에 뛰어들어 크게 성공했다.

한편, 소방마는 출동 알람이 울릴 때 자동으로 열리는 문을 통해 나와 기구 거는 장소에 서도록 훈련받았는데 매번 한 치 오차가 없었다. 무수한 반복 교육 효과를 포함해 각 개체 역량 역시 까다로운 조건을 통과할 만큼 우수한 까닭이다. 디트로이트 기준에 따르면, 성별 구분 없이 ▲1,100파운드(약 500kg)에 달하는 마차 이동 ▲증기 소방펌프 1,400파운드(약 635kg) 적재 ▲1,700파운드(약 770kg)의 갈고리와 사다리 운반 등을 너끈히 해내야 했다.

더불어 소방관과 수의사가 동참해 성품을 살폈다. 강하고 민첩해야 할 뿐 아니라 순종적이어야 길들이기 쉬웠다. 덧붙여 불길을 제압하는 동안 참을성 있게 기다릴 줄 아는지 관찰했다. 만약 최악의 환경이나 기상에 놀라거나 흔들리면 탈락이었다.

귀여운 달마시안과 도로명 주소에 고스란히 남아 있는 역사의 흔적

마차 곁에서 달리며 사이렌 역할을 톡톡히 한 달마시안 품종 / 출처 : Pixabay

두세 마리의 소방마가 한 팀을 이룰 때 반드시 같이하는 동물이 있었으니 우리에겐 디즈니 영화로 익숙한 달마시안이다. 점박이 무늬가 멋스러운 이 개는 말과 친밀한 데다 활동적이어서 평소 마구간을 드나들며 장비를 지키거나 출동에 따라갔다. 특히 마차 앞에서 빠르게 달리며 짖으면 대다수가 인지하고 비켜주기에 장애물을 치우고 경로 확보하기가 쉽다는 장점이 있었다. 즉, 지금의 사이렌을 대신한 셈이다.

요즘으로서는 상상하기 어렵겠지만, 이렇듯 구성한 소방마차는 1900년 파리 올림픽에서 스포츠 종목 가운데 하나로 정해진 바 있다. 단순히 불 끄는 경주를 해서 속도가 가장 빠른 팀이 승리하는 규칙이었다. 그러나 취지와는 다르게 오히려 상해 사고에 휘말리면서 진기명기에 가까운 여타 이색 게임과 함께 자취를 감췄다. 아울러 20여 년 뒤엔 소방차가 나타나 모든 역할을 도맡으면서 그 자체로 역사의 뒤안길을 향해 사라졌다.

비록 한 시대를 풍미한 소방마차는 더 이상 거리를 활보하지 않지만, 북미, 유럽 등 서구권에 남긴 영향은 여전히 남아 있다. 달마시안은 앞서 소개한 이유 덕분에 미국 소방서 마스코트로 사랑받고 있으며, 화재 지점으로 정확히 말을 몰기 위해 영국이 고안한 도로명 주소 제도는 우리나라를 비롯한 전 세계에서 널리 활용 중이다.

896년에 활약한 소방마차 / 출처 : Wikimedia Commons

글. 오민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