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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방방화시설의 역사 Ⅱ
(비상구 및 유도등)

건축물은 외부 또는 다른 용도의 공간과 물리적 구획의 방법으로 용도에 맞춘 공간을 제공하여 편익을 제공한다. 사람들이 필요로 하는 공간의 용도가 세분화되고 자본이 집약되어 건축물은 갈수록 커지고 복잡해져 가고 있다.

그러나 편익을 위한 건축물 공간의 복잡한 물리적 구획은 반대로 화재와 같은 재난이 발생할 경우 연기와 열 등 위험요소와 사람들을 건축물 내부의 공간에 가두는 위험한 양면성도 가지고 있다. 한정된 공간 안에서의 열과 연기 같은 위험요소들은 축적되는 농도에 비례해 그 위험성이 극대화되기 때문에 건축물에 재난이 발생했을 때 내부에 있는 사람들은 무엇보다도 외부로 나가는 대피를 최우선으로 수행해야 한다. 비상구와 유도등은 건축물 내부에 있는 사람들이 외부로 대피하기 위한 피난과 관련한 대표적인 설비이다. 최초의 비상구와 유도등은 어떤 사건들을 계기로 만들어지게 되었고 발전했는지 살펴보고자 한다.

먼저 용어를 간략히 정리해보면 표준대국어 사전에서는 비상구(非常口)를 ‘화재나 지진 따위의 갑작스러운 사고가 일어날 때에 급히 대피할 수 있도록 특별히 마련한 출입구’라고 정의하고 있다. 현행 소방 관련 법상 ‘비상구’라는 용어는 주로 ‘다중이용업소의 안전관리에 관한 특별법’상 다중이용업소의 안전시설을 지칭하는 용어로 영업장 안에서 주된 출입구로의 퇴로가 막힐 경우에 대비해 Fail Safe원칙에 따라 반대편으로 탈출이 가능한 문으로 규정하고 있다. 이렇듯 비상구가 가지는 가장 본질적 요소는 상용의 출입구와 별개의 시설로서의 가외성(加外性)이라고 할 수 있으며 또한 피난의 기능이 강조된다.

1. 건축물에서 사용자의 안전을 고려한 비상구의 필요성이 제기된 사건은 영국 선덜랜드 지방의 빅토리아홀에서 1883년에 발생한 어린이 압사사고이다.

빅토리아 홀은 당시 사람들이 만남의 장소로 정하는 등 지역을 대표하는 건축물로서 내부에는 무대와 3층으로 된 객석이 있는 고딕양식의 건물이었다.

1883년 6월16일 토요일, 빅토리아 홀에는 목각 인형극 마술쇼 등을 순회 공연하는 Fay부부의 공연이 예정되었는데 1,100명의 어린이들이 빅토리아 홀에 모였다. 공연 도중 추첨에 따라 출구에서 선물을 나눠준다는 안내를 듣자마자 어린이들은 일제히 출구로 몰렸다. 일부 어린이는 3층에서 2층으로, 2층에서 1층으로 뛰어내리기도 했다. 그런데 내부계단과 출구 사이에는 티켓 확인을 위해 한 번에 한 명만 통과할 수 있도록 22인치의 틈만 남긴 구조물이 설치되어 있었고, 결국 구조물과 인파에 끼인 3세부터 14세의 어린아이 183명이 사망하게 되었다.

이를 계기로 사고 원인이 이슈화되어 공연을 위한 공공 건축물에서 외부로 직접 나갈 수 있는 최소한의 비상구를 설치할 것을 내용으로 한 법률이 제출되었다. 또 사고의 교훈에 영감을 받아 군중이 몰린 상황에서도 문의 잠금장치를 조작해 나갈 수 있는 ‘Panic Bar’로 불리는 잠금장치가 발명되었다.

2. 그러나 단지 설치기준만 따르게 하는 규제의 효과는 실제 사람들을 대피시키는 비상출구 기능의 강화까지 미치지 않았다.

시카고 대화재 이후 엄격한 화재예방 규제 아래 1903년 11월 개장한 Iroquois Theatre의 홍보전단지에서는 “절대적인 화재방어(Absolutely Fireproof)와 27개의 출구가 있어 1,700명의 관객이 5분 내로 대피할 수 있다"라는 안전을 강조하였지만 화재 이후 드러난 실상은 홍보내용과 달랐다. 우선 시카고의 엄격한 화재예방 규제는 대부분 자본가인 극장 측에 의해 무시되었고, 27개의 출구는 대부분 안쪽 방향에서 열리는 구조거나 출구에 이르는 경로가 혼잡 또는 출구 자체를 식별할 수 없는 등 제 기능을 하지 못해 결국 602명의 사망자가 발생했다. 사고 이후 시카고 당국은 즉시 모든 극장의 운영을 중지하고 외부 방향으로 열리는 구조의 문과 상기한 Panic Bar형식의 문을 설치하고 모든 출구는 명확한 표시를 할 것을 의무화했다.

또 다른 사례로 1911년 3월 25일에는 맨하탄 ‘Asch’빌딩의 8층부터 10층까지 3개의 층을 사용하던 ‘Triangle Shirtwaist’ 의류 제작 공장에서 난 화재로 146명의 사망자가 발생했다. 사고가 난 건물은 당시 화재에 대응한 최신 기술인 내화구조로서 대화재 이후 엄격한 화재예방 규제의 기준에 따라 내부에는 2개의 화물용 승강기와 1개의 피난계단, 도로로 내려갈 수 있는 2개의 외부계단을 가진 건축물이었다.

그러나 기준을 준수해 설치된 화재 대비 시설물들은 건물을 점유하고 사용하는 사람들의 편의와 안이한 안전의식으로 그 기능을 잃은 상태였다. 노동자의 근태 관리나 도난사고를 방지하기 위해 출입문을 잠가 놓거나 가연물이 많은 공장의 화재진압을 위해 비치된 방화수통에는 물이 없는 상태였으며 피난경로를 고려하지 않은 거대한 작업 테이블 등은 결국 막대한 인명피해로 이어지게 되었다.

이처럼 단순히 건축물에 설치된 시설의 수량에 초점을 맞춘 기준은 실제 재난 시 사람의 피난상황을 반영하지 못했고, 건축물 공간의 효율적 사용을 최우선으로 하는 사용자들의 낮은 안전의식은 피난시설의 중요성을 무시했다.

맨해튼 사건으로 사망자의 대다수인 근로자의 열악한 근로환경이 이슈가 되어 뉴욕 주는 공장 근로자의 안전을 위한 수십 개의 법률을 제정하게 되었고, 피난 방화 규제의 목적도 인명안전에 초점을 맞추기 시작했다.

미국방화협회 NFPA는 화재안전기준의 목적을 ‘화재로부터 건물을 보호하는 것’에서 ‘사람을 보호하는 것’으로 확장했다. 이후 NFPA의 인명안전위원회(Committee on Safety to Life)에 의해 1913년 건물탈출코드(Building Exits Code)를 시작으로 인명안전코드(life safety code)를 제정하게 된다.

1930년대와 40년대에 NFPA에서 건물화재 방호와 인명안전을 담당하던 Robert Solomon은 색상의 대조와 크기, 글씨체, 글씨 폭을 실험하여 적색 굵은 문자로 표시한 ‘비상출구표지판’ 기준을 만들었는데 이 기준은 이후 미전역의 주와 지방정부의 표준이 되었다.

비상출구를 표시하는 표지판에서 시작한 유도표지와 유도등은 건축물 내의 복잡한 경로로 설치영역이 확장되었다.

우리나라에서 현재 쓰이고 있는 유도등의 디자인은 1992년부터 ISO-6309 국제표준을 따르고 있다.

이 국제표준안은 1980년 일본에서 제출한 픽토그램 기반의 출구 유도등 국제표준안으로서 1972년 오사카 센니치백화점 화재와 1973년 구마모토 다이요 백화점 화재에서 비상구 식별이 어려워 사망자가 많았다는 지적에 따라 비상구 표지를 공모해 입선한 안을 변형한 디자인이다. 이미 국제표준기구에 제출된 소련의 국제표준안과 경쟁하여 87년 8월 국제표준으로 결정되었던 배경을 가지고 있다.

일본에서는 그보다 오래전인 2차 대전 이후부터 유도등에 녹색을 사용하고 있다. 그 이유에 대해 1978년 일본 화재학회에 발표된 ‘유도등 녹색의 유래’와 ‘일본 사인·디자인 연감’에서는 ‘1935년 일본 민방위기구인 방공위장(防空僞裝)의 비상구 표지 색상에 대한 기초실험으로 녹색이 적합하다는 결과와 사회통념상 녹색이 안전을 상징하는 색상으로 무난하다’라고 언급한 내용을 근거로 제시하고 있다. 이 국제표준안 디자인과 색상은 큰 수정 없이 현재까지도 우리나라의 유도등에 사용되고 있다.

그러나 현재 사용하고 있는 국제표준안이 현재에도 최선책으로 유효한가를 다시 한 번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유도등에 녹색을 쓰는 이유로 사회 통념이 녹색이 안전을 상징한다는 주장 외에 과학적인 근거로 시각세포를 든다. 어두운 곳에서의 시감각은 간상세포가 관여하고, 간상세포는 녹색의 파장 대역인 500nm일 때 가장 민감해서 야간이나 연기가 자욱해도 식별할 수 있다고 하는 주장이다.

그렇지만 2019년 2월 동의대학교 산학협력단에서 제출한 「지하철역 화재에 의한 재난 발생 시 시인성이 높은 피난유도사인시스템 개발 최종보고서」의 연기 속 색상의 투과성 실험 결과에 따르면 연기의 유무, 발광원과 측정도구의 거리 등 여러 실험 조건하에서 가장 명도가 높고 시인성이 좋은 색상은 노랑 계열이었으며 빨강계열의 색상이 적절히 포함될 때 휘도가 높은 것으로 나타났다.

실험 결과가 보여주듯 시감각이 감지되는 특성과 자극에 대한 민감도가 크다는 이유로 녹색이 환경변화를 예측할 수 없는 재난현장에서 시인성이 반드시 좋다고 단언할 수 없다.

또 국제표준안 픽토그램 속의 달리는 사람의 도안은 특정한 방향으로 뛰어가는 모습이어서 마치 피난방향을 제시하고 있다는 오해의 여지가 있다는 문제제기가 수년간 계속 되고 있는 점은 현재 사용하는 국제표준 디자인의 한계를 보여주며 개선의 필요성을 시사한다.

최근기술의 발전으로 화재인식을 하는 유도등과 말하는 유도등, 선행음의 방향만 인지하는 인간감각의 특성을 활용한 HASS효과 유도등들이 출시되는 등 종래의 단순한 표식기능에 그치던 유도등의 기능이 확장되고 있는 점은 고무적이다.

그러나 발전된 기술이 적용되고 기준이 정비되어도 건축물 안에 위치가 고정되어 있는 피난‧방화시설의 기능이 닿는 물리적 범위에 한계가 있다.

피난 방화시설이 제 기능을 하기 위해서는 실제 피난을 고려한 각 시설의 유기적 설계와 시공 그리고 사용자의 올바른 관리가 전제 되어야하며, 비상구 등 피난‧방화시설의 중요성과 인식, 건축물에 재난이 일어날 가능성에 대한 위험의 감수성 등 사회전반의 안전의식 수준의 향상을 위한 정책적, 구성원의 노력이 필요하다.

글. 송병준|중앙소방학교 예방안전학과 전임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