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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TSD를 KO시킨 소방관 파이터 신동국

괴산댐은 1952년 발전 전용으론 우리나라 최초의 댐이다. 댐 건설 이후 조성된 괴산호는 수려한 용모를 뽐내고 있다.

Q. 수난구조대라는 것이 일반인에게는 생소할 것 같다. 소방관이라고 하면 건물이나 산에서 불을 끄거나 구조 활동을 하는 사람이라고 생각하는데 무슨 일을 하는가?
A. 나도 소방관이 되고 나서야 소방관이 정말 다양한 일을 하는구나하고 알았다. 수난구조대는 바다와 내수면에서 구조 활동을 하는데, 코로나19 때문에 요즘은 뜸하지만 관광이나 여행하는 사람도 많고, 수상 레포츠 즐기는 사람, 낚시나 물놀이하는 사람, 그렇게 사람들이 몰리고 하다 보니 안전사고가 발생하게 되고 구조대원도 필요하게 된다. 충주수난구조대가 생긴 이유는 1994년에 충주호 유람선 사고로 30명이 사망하고 33명이 부상을 당하는 참사가 발생했는데, 그 계기로 충주소방서가 1997년에 충주댐 옆에서 발대를 해서 화재 진압하는 소방정 701호 큰 거 1대, 702호 고속정 1대 가지고 시작됐다. 그러다 2017년 충북소방본부에서 광역119특수구조단을 창설하면서 통합됐다.

Q. 어떻게 소방관이 되었나?
A. 군대를 특전사로 들어가서 UDT와 이라크 파병까지 5년 동안 복무 후 제대를 해서 다음 할 일을 찾고 있는 동안 부모님 일을 도와주고 있을 때였다. 아버지와 함께 차를 타고 가다가 우연찮게 트럭이 전복되는 교통사고를 목격하게 됐는데 평소 의협심이 남다르시던 아버지께서 고민할 사이도 없이 현장으로 뛰어 드셨다. 당시 특별한 군 이력에 남들이 하지 못한 경험을 많이 했다고 생각했고 신체적으로 무슨 일이든 할 수 있을 만큼 자신이 있었는데 겁이 나서 사고현장에 다가갈 수가 없었다. 마치 총 쏘는 연습을 매일해서 굉장히 잘 쏜다고 자부하고 있는데 전쟁에 나서지 못하는 그런 상황과 비슷했었다. 사고자를 꺼내시려고 애 쓰시는 아버지를 보고 어쩔 수 없이 겨우 도와드리는 척은 했지만 그 자리를 벗어나고 싶은 생각뿐이었다. 그러던 중 소방대원들이 도착해 능숙하게 부상자를 구하고 사고현장을 수습하는 모습을 보고 내 자신에게 수치심이 들었고 그런 만큼 소방대원들이 너무 멋있게 보였었다. 그때부터 소방관이 되어야겠다는 다짐을 하고 공부에 매진해서 2008년 충북소방구조특채에 합격할 수 있었다.

Q. 경기 전 계체량 행사에서 방청객들에게 겨울철 화재예방의 중요성에 대해 말하는 모습을 보면서 정말 뼈 속까지 소방관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A. 경기를 임하는 이유가 격투가라서가 아니라 소방관이라서 사람들 앞에서 경기를 치르는 것이다. 그렇지 않으면 단지 취미생활 밖에 되지 않는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다른 선수들처럼 경기에 대한 이야기만 할 수는 없다. 내가 그 자리를 임하는 것이 일반 파이터가 아니라 소방관으로서 임한다면 좀 더 의미가 있는 것이 아닌가 생각한다.

소방관으로서의 신동국은 전혀 위협적이지 않은 온화하고 충직한 사람으로 보였다.

Q. 그렇게 소방관에 대한 자부심이 강한데 어떻게 외상후 스트레스 장애(PTSD)를 겪었나?
A. 오늘도 소방관 한분이 창고에서 독극물을 마시고 자살을 하셨다는 소식을 들었다. 올 해만해도 벌써 몇 분이 그렇게 돌아가셨다. 소방관들이 출동하는 곳은 일단 안 좋은 상황이다. 도움이 필요한 급박함이 있기 때문에 우리를 부르는 것이다. 하루 중 가족과 있으면 행복해야하는 시간인데 우리가 일하는 현장들은 다 우울한 상황이다. 울고, 돌아가시고, 다쳐서 소리 지르고 있고, 다 이런 곳만 다니니깐 그런 환경에 계속 노출이 되면 자신도 모르는 사이 주체를 할 수 없게 된다.

Q. 그런 사고 현장을 용기 있고 능수능란하게 처리하는 것을 동경하고 소방관이 된 것이 아닌가?
A. 첫 출동한 날 얘기를 해야 할 것 같다. 석산에서 천공작업을 하고 있던 인부가 산이 무너져 내리면서 깔리는 사고였다. 사람이 바위에 깔렸으니 얼마나 끔찍하겠나. 소방관이 되면서 가장 우려했던 것이 죽은 사람을 봐야한다는 것이었다. 걱정이 되어서 선배님께 여쭤보니 한 달에 죽은 사람만 10명도 넘게 본다고 했다. 이전까지 사람이 죽거나 크게 다친 것을 본적이 없다. 친인척이나 주위에도 누가 돌아가신 적도 없었다. 군 생활이나 파병 때도 크게 다친 사람이 없었다. 소방관이 되고 첫 출동이 석산에서 천공작업을 하다가 산이 무너진 사람이 깔린 사고 현장이었다.

Q. 첫 출동인데 감당하기 어려웠을 것 같다.
A. 그래서 가는 동안 ‘야, 이거 큰일 났다. 사람이 바위에 깔렸으면 얼마나 처참할까’하는 생각이 들어 엄청 긴장을 했다. 그래도 선배님들 앞에 얼마 안 된 신참으로서 나약한 모습을 보여드리기 싫었고 겁쟁이로 보이기도 싫어서 마음을 단단히 먹고 현장에 도착해 시신을 수습하는데 다리 한쪽이 절단 돼서 떨어져 나가 있었고….

Q. 참혹했었겠다.
A. 그랬다. 하지만 다행스럽게도 돌아가신 분이 엎드려 있어서 얼굴을 보지 않았기에 어떻게 잘 수습하고 일을 마쳐 첫 출동치고는 잘 극복했다는 자신감을 얻었다. 그렇게 되니 그 다음부터는 아무리 처참한 사고현장에서도 아무 거리낌 없이 업무를 수행했다. 그렇게 현장 하나하나씩을 해결해나가면서 뿌듯함도 느꼈고 아무나 못하는데 나는 아무렇지 않게 할 수 있다는 자부심을 느끼며 열심히 했었다. 그렇게 몇 년간 해오고 보니깐, 나는 모르고 있었던 것이다.

Q. 쌓이고 있었다는 것을?
A. 그렇다.

괴산 수난구조대 사무실 안에서의 담화. 외상후 스트레스 장애를 겪었던 당시 극복하기 힘든 감정들을 어렵게 이어가고 있는 신동국 소방관

Q. 그러면 의식하지 못하는 사이에 그렇게 정신적인 충격이 쌓이는 것인가?
A. 처음엔 주위 사람들이 물어보면 끔찍한 사고현장을 허세를 떨면서 이야기해주곤 했지만 유쾌하지 않은 일을 그렇게 반복하다보니 점점 침울한 사람이 되어갔고 어느 날부터인가 잠도 잘 오지 않았고 잠이 들어도 계속 무언가에 쫒기거나 싸우는 악몽을 꿨다. 그렇게 악몽에 시달리다보니 점점 더 잠이 오지 않았고 그것이 계속 반복되었다. 가장 힘든 것은 그 동안 봐왔던 그 처참한 사고현장의 광경들이 나나 내 가족에게 벌어질 수 있다는 생각이 머리에서 떠나지 않는다는 것이다. 교통사고 현장에서 끔찍한 것을 보면, 부모님이나 아내가 다 운전을 하니깐 사고나는 거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고, 나중에는 집에 전화를 했는데 받는 사람이 없으면 몇 일전에 우울증으로 자살한 사람이 봤는데 몇 일전 다툰 아내가 자살한 게 아닌가 하는 이런 생각이 자꾸 들어 불안을 견딜 수가 없었다. 그게 점점 심해져갔다.

Q. 일종의 강박증 같다.
A. 그래서 이상한 버릇이 생겼다. 불길한 생각이 들 때 그것을 나름 떨쳐버리기 위해 특이한 행동을 하기 시작했다. 이를테면 이 물건이 이렇게 놓여있으면, 이게 불길한 예감이 들면 저렇게 놓아보고 아니면 치워보고 그러면 괜찮겠지 하면서 계속했다. 이런 유형들의 일들이 심해지면 나중에 이런 불필요한 행동들을 하는 것에 대해서 또 스트레스를 받고 그렇게 악순환 되더라.

Q. 뭔가 돌파구가 필요한 것 같다.
A. 그래서 정신병원에 갔다. 수면제, 신경안정제, 항우울증약 해서 3가지를 주셨고 약을 먹기 시작하면서 잠을 잘 잤다. 그런데 다음날까지 하루 종일 사람이 축 처져서 무기력해졌다. 아무것도 하기 싫었고 의욕도 없이 계속 늘어져 있었다. 그래도 어떻게 꾸역꾸역 6개월 동안 약을 복용해봤다.

Q. 어떠했나? 차도가 있었나?
A. 더 죽겠더라. 차라리 약을 안 먹고 잠을 못자는 게 컨디션이 더 좋을 것 같았다. 그래서 약을 끊었다. 끊고 나서 다시 잠을 못자고 신경이 예민해지고, 그러다보니 성격이 날카로워져서 아내나 동료, 주위 사람들에게 짜증을 내고 그러다 보니 ‘저 사람 성격 안좋다’ 이런 분위기가 형성이 돼서 사람들과의 관계가 끊어져서 아웃사이더 같은 존재가 되어버렸다. 그러다보니 그런 직장을 다니는 것에 또 스트레스를 받았다. 그러면서 소방관을 왜 했을까 회의감도 들었다. 그러다 술에 손을 대기 시작했다. 그 이전까지 술을 한 적이 없었다. 어렸을 때부터 엄하신 사부님으로부터 운동을 해서 몸에 안 좋은 술, 담배 같은 것은 손에도 댄 적이 없었다.

괴산 수난구조대 사무실 앞에서 김종기 팀장님과 함께

Q. 자꾸 수렁으로 빠지는 기분이다.
A. 술을 마시기 시작하면서 우선 회식자리가 재밌어졌다. 이전에는 술을 마시지 않아 그 자리가 곤혹이었는데 시간도 잘 가고 재미있고 항상 날카로운데 술만 먹으면 사람이 좋아지니깐 동료들이랑 친해졌다. 하지만 다음 날 출근하면 또 날카로워져 있었다. 그런데 이 술이 한번 손을 대니깐 거기서 헤어 나올 수가 없는 거다. 그래서 3, 4년 동안 술에 찌들어 살았다. 그 시간이 제 인생에서 가장 아깝게 여겨진다.

Q. 신체능력이 워낙 탁월해서 술도 엄청 마셨을 것 같다.
A. 성격이 외골수 같은 면이 있어서 뭘 하나 하면 그것밖에 모른다. 운동할 땐 운동밖에 모르고. 그래서 그 때 술을 정말 엄청 마셨다. 소방관도 쉽게 된 게 그 땐 공부만 했기 때문이다. 그런데 술을 마시면 안 좋은 일이 여러 가지로 꼬인다는 것이다. 술 때문에 직장에도 늦고 같이 술 마시는 사람들이 담배를 피니깐 따라서 피게 되고 그러면서 그 때 고등학생부터 만들어왔던 몸이 다 망가져버렸다. 술 마시다 사람들과 시비가 붙어 사고도 치고 그것마저도 별 감흥이 없어 막 살자 그냥, 그렇게 삶을 포기한 사람처럼 살았다.

Q. 아내분이 엄청 힘들었을 것 같다.
A. 삶이 한 번 어긋나기 시작하기깐 한 없이 망가지더라. 그러다 제일 밑바닥까지 가니깐 내가 왜 이렇게 됐지 하는 생각이 들었다. 나름대로 FM으로 살아왔고 목표를 가지고 살았는데 한 순간에 바보가 된 기분이었다. 그런 와중에 아내가 제 정신을 차리게 하려고 한 것 같은데, 그 즈음에 짐을 싸들고 집을 나갔다. 그 때 모든 걸 포기하고 그냥 집에서 술 마시고 쓰러져 있었다. 그런데 아내가 전화가 왔다.

Q. 그게 2015년 쯤 되었을 것 같다.
A. 맞다. 2016년 3월부터 운동을 시작했으니깐. 아내가 못 살겠다. 이혼하자고 해서 법원에 갔다 와서 한 달 가량 보류기간을 줘서 아내는 친정 가있고 나는 집에 혼자 있었다.

신동국 소방관은 2009년 개최된 최강소방관경기에서 우승할 만큼 신체적으로 강인한 사람이었다.

Q. 술을 더 마셨을 것 같다.
A. 그랬다. 그런데 혼자 집에 있으니깐 생각을 좀 하게 되더라. 왜 이렇게 됐지? 하고 자문을 하다 보니 나중엔 제 자신에게 화가 나기 시작했다. 그래서 뭔가 흐름을 바꿀 수 있는 무언가를 찾아야겠다는 생각을 하다가 어렸을 때부터 운동을 하면서 동경했었던 그 ‘강함’에 대한 생각이 떠올랐다. 사실 그래서 일부러 군대도 힘든 곳을 찾아서 간 것이고, 소방관이 돼서도 체력으로 인정받으려고 전국대회 나가서 1등도 한 것이고, 그런 동경이 있었는데 유일하게 제가 그때까지 이루지 못한 것이 격투기라는 스포츠였다. 하지만 그 때까지는 격투기가 일반인이 할 수 있는 것은 아니라고 여겼고 도달할 수 없는 꿈같은 것이었는데 인생이 그렇게 망가지다보니 오히려 두려움이 사라지더라. 그 때 나이가 38살인가 그랬다. 하지만 이왕 이렇게 된 거 정말 현역 선수들만 다니는 체육관을 찾아가서 한번 부딪혀보리라는 오기가 생기더라. 그래서 아내한테 전화를 해서 미안하다고 사과를 하고 다시 한 번 인생을 시작해보겠다는 마음으로 격투기를 해보려고 한다고 하니 아내가 선뜻 응원을 해줬다. 그래서 다음날 원주에 선수를 육성하는 체육관에 찾아가서 운동을 시작했다.

Q. 그래서 이전의 삶과는 단절을 했나?
A. 제 성격이 그렇다. 뭐 하나에 빠지면 그것에만 매달린다. 술, 담배 모두 끊고 운동만 했다. 처음엔 엄청 힘들었다. 몸이 다 망가진 상태에서 격한 운동을 하다 보니. 나이도 적지 않고. 몇 달 동안은 정말 고생했다. 하지만 그렇게 참고 하다보니깐 몸이 먼저 반응하면서 예전 건강했던 시절로 돌아가기 시작했다. 그렇게 몸에 자신감이 조금씩 생기다보니 격투기를 더 잘하고 싶다는 욕망이 생기고 같이 운동하는 선수들과도 선의의 경쟁이 생기기 시작하고 그러니 뭔가 더 잘하고 싶고 그런 선순환 이뤄지면서 삶의 더 높은 곳을 바라보게 되는 과정을 겪었다.

Q. 잠은 잘 잤나?
A. 뭔가 목표가 생기고 에너지를 그것에 다 소진하다보니깐 불면증도 없어졌다. 그렇게 재충전해서 본업인 소방관 직으로 돌아가면 기분도 좋아져서 더 열심히 하게 되고, 퇴근하면 운동하러 가야지 하는 생각에 활력이 생겨 동료들과도 잘 지내고. 동료들이 관심을 가져주니깐 동기부여가 돼서 더 운동을 열심히 하고 그러면서 아마추어 대회에서 승률이 조금씩 쌓여가니깐 대회에서 프로선수 제안을 하더라. 그렇게 데뷔를 하게 됐다.

국내 최대 격투기 단체인 로드FC가 주최하는 프로 파이터 경기에서 신동국 소방관은 4승2패의 좋은 성적을 올렸다. 최근 그는 로드FC 챔피언 출신으로 전 세계 격투기 최대 무대인 UFC에서 활약한 남의철 선수와 대등한 경기를 펼쳤지만 아쉽게 판정패했다. 사진은 일본 하야시 타모쓰와의 경기, 로드FC 제공.

Q. 결과만 보면 외상후 스트레스 장애를 이겨낸 모범 사례 같은데.
A. 외상후 스트레스 장애라는 게 개개인마다 차이는 있겠지만, 제가 운동을 통해서 이것을 극복했다고 해서 다른 분이 그렇게 한다고 극복이 된다고 생각을 하면 안 될 것 같다. 사람마다 상황과 성향이 다 다를 것 같다. 하지만 한 가지는 필요하다고 느끼는 게, 어느 직업이든 그 하나만 계속 하다보면 직업이 곧 삶이 되어버리는데 그러면 안 된다고 생각한다. 그렇게 되면 나중에 직업에 대한 소명의식도, 자아실현도 사라지고 매너리즘에 빠질 수 있다. 그래서 삶과 직업을 분리를 시켜줘야 한다고 생각한다. 직업은 사회적인 사명감을 가지고 행하고 삶은 그 여백에서 자기 자신을 찾아주는 역할을 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격투기 같은 특이한 것이 아니더라도 자신에게 맞는, 자신이 좋아하는 것을 하면서 살아야 균형 잡힌 삶을 살 수 있다고 생각한다. 특히, 소방관과 같이 일반적인 사람이 경험할 수 없는 일을 한다거나 밖에서 그것을 환기시킬 수 있는 방법을 찾기 어려운 직종이라면 삶이 시들 수밖에 없는 상황이라고 생각한다.

Q. 외상후 스트레스 장애를 겪는 사람에게 전하고 싶은 말이 있나?
A. 평소 주위에서 강하다고 여겨지는 사람이 오히려 외상후 스트레스 장애에 더 취약한 것 같다. 그럴수록 자신이 이 정신병에 걸렸다는 것을 사람들이 알까봐 두려워하고 그것을 수치로 여기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제가 그랬듯이. 겪어보니깐 오히려 사람들에게 자신의 상태를 알리고 도움을 받는 것이 더 현명한 것 같다. 이게 참 신기한 것이 내가 그렇게 인정하고 그것에 대해 사람들과 이야기를 나눠봐야 내 상태를 내가 알 수가 있다. 그 전엔 자꾸 다른 것으로 이것을 덮으려고 하고 그러다보면 병은 더 심해진다. 이 병도 감기처럼 다른 병과 똑같다. 그냥 아프면 아픈 대로 수치스러워 하지 말고 사람들과 상의를 하면서 본인을 인정하고 받아들여야 한다고 생각한다.

신동국 소방관은 프로 파이터로 그는 6전을 치르는 동안 받은 대전료를 어려움을 겪고 있는 동료 소방관과 이웃들에게 모두 기부하고 있다.

Q. 끝으로 하고 싶은 말이 있다면.
A. 격투기를 하고 프로에 데뷔하면서 바람이 있다면 국민들께서 소방관들에게 보내주시는 응원과 사랑을 돌려드리고 싶다는 마음이 있었다. 그 마음을 표현하기 위해 경기에 임하고 있다. 지금처럼 저희 소방관을 믿어주시고 응원해주신다면 정말 감사할 것 같다. 제가 격투장에 오르는 이유는 동료 소방관들에게 희망과 용기를 주기 위해서다. 그래서 경기에선 정말 지기 싫다. 나 같은 별 볼일 없는 사람도 이렇게 외상후 스트레스 장애를 이겨내고 열심히 삶을 살아가는데 우리 동료 소방관들이 그런 면에서 대한민국 소방관으로서 자부심을 느끼고, 제 경기를 보면서 스트레스도 풀고, 그러면서 현장에선 최선을 다하고 자신의 삶에서는 자신을 아끼고 사랑하는 그런 삶을 살았으면 좋겠다. 더 이상 스스로 목숨을 끊는 소방관이 없길 바란다.

인터뷰가 끝난 후 격투기를 좋아하지 않았지만 그에게 이 말은 꼭 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것은 사람으로서 느끼는 진한 인간미의 발로였다. “다음 경기 꼭 보겠습니다. 응원합니다.”

글. 최호철(소방안전플러스 편집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