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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방방화시설의 역사 Ⅵ
(가스계소화약제)

불이라고 다 똑같은 불이 아니다. 화재가 발생하면 물로 끌 수 있는 불도 있지만, 그렇지 않은 불도 있다. 또한, 물로 끄는 것보다 다른 건조 소화약제를 사용할 때 효과가 좋은 경우도 있다. 소방청 “2022년 예방소방행정 통계자료 소방시설 설치현황”에 의하면 국내 가스계 소화설비는 약 2만 4천개이며, 사용하는 소화약제는 이산화탄소, 분말, 할론, 할로겐화합물 및 불활성기체이다.
화재예방, 소방시설 설치ㆍ유지 및 안전관리에 관한 법률 시행령에 의해 전기실, 발전실, 변전실과 같이 주수소화가 안 되는 장소를 방호하기 위해 사용한다.
그럼, 가스계 소화약제는 언제부터 사용했을까? 이번 시간을 통해 간략한 해외 가스계소화약제의 역사를 살펴보고자 한다.

물 이외의 소화약제 필요성

19세기 중반 화석연료의 에너지를 직접 사용하는 내연기관의 등장으로 물로 소화하기 힘든 화재가 발생하기 시작한다. 내연기관의 연료로 사용하는 정제된 석유는 불이 붙은 채 물위에 떠 있어 물을 분사하는 소화방법이 소용이 없었다. 발전기의 발명과 공공 전기망이 구축되어 전신, 전화, 전구 등 본격적인 전기의 사용으로 발생한 새로운 유형의 화재는 물로 가연물의 온도를 낮추어도 꺼지지 않았고 전류가 흐르는 상태에서 물을 사용할 때는 감전의 위험도 있었다. 화석연료를 원료로 하는 플라스틱에 물을 쏟아 부어도 불이 잘 꺼지지 않았으며 제련기술과 관련 산업의 발달 과정에서 가끔씩 발생한 금속화재는 심지어 물을 부으면 폭발하기도 했다. 산업의 발달과 소재의 발전으로 생겨난 새로운 유형의 화재는 물로 끄기 힘들 뿐만 아니라 전신, 전화국의 교환시설과 같이 물에 닿으면 훼손되어 그 기능을 복구 할 수 없는 고가의 장비와 시설을 갖춘 공간, 박물관처럼 유일무이한 물건들을 원상태로 보존해야하는 공간처럼 화재가 나도 물을 사용하는 것이 제한되는 장소도 생겨났다. 즉, 산업의 발달은 물 이외에 다른 소화약제를 필요로 했다.

다양한 소화약제의 등장

20세기 초에 물 이외의 많은 소화약제가 등장했다. 화석연료를 본격적으로 사용한 후부터 빈번해진 유류화재를 진압하기 위해 거품으로 불붙은 유면을 덮는 소화약제, 분말형태의 소화약제와 주수소화가 불가능한 중요 시설물에 이산화탄소 소화약제가 등장했다. 그리고 가연물, 산소, 점화원 화재의 3요소를 제어하는 것을 넘어 화재를 지속하는 연쇄적 반응을 제어하는 할론 소화약제 등이 등장하였으며, 할론 소화약제의 환경과 인체에 대한 유해성이 밝혀진 이후 이런 문제점을 해결하기 위해 등장한 할로겐화합물 및 불활성기체 소화약제가 대표적이다.

I. 이산화탄소와 분말소화약제

1. 이산화탄소소화약제

최초로 상업적 목적으로 이산화탄소를 소화약제로 만들어 판매한 사람은 월터 키드(Walter Kidde)였다. 1900년 23세가 되던 해 월터 키드는 뉴저지에서 자신의 이름을 딴 조선소 회사인 월터키드 앤 컴패니(Walter Kidde & Company)를 설립했다. 그는 화물선에 화재가 나면 고가의 화물이 속수무책으로 훼손되는 것을 보며 화재로부터 화물을 보호하는 것에 관심을 가지게 되었다. 1918년 키드는 선박 안에 화재를 감지하고 증기로 화재를 진압하는 소방설비인 리치(Rich) 시스템의 특허 권리를 취득한다. 리치시스템은 팬(fan)이 달린 파이프와 밸브로 제어할 수 있는 증기 파이프를 배치하여 수동으로 밸브를 조작해 해당 구획실에 증기를 공급하는 방법으로 화재를 진압하는 시스템이다. 그러나 증기를 발생시키는 과정에서 선박과 화물에 손상을 가하였으며, 원하는 시점에 증기 생성이 어려웠다. 또한 화재 진압능력까지 떨어지는 큰 결함이 있었다. 이에 증기를 이산화탄소로 바꾸어 새로운 선박용 화재진압 시스템을 루크(Lux)라는 이름으로 판매하였다. 또한 1924년에는 휴대용 이산화탄소 소화기를 제작 판매했다. 이산화탄소는 전기와 가연성 액체의 화재를 진압하기 위한 소화약제로 부각되면서 세계대전 중 항공기의 화재진압 시스템에 사용할 약제로 고려되기도 하였다. 이후 특정 용도의 건축물의 소방시설 소화약제로 영역이 점차 넓혀졌다. 1927년에 미국 국가 표준국(NBS)에서는 다양한 유형의 화석연료를 소화하는데 필요한 이산화탄소의 최소 농도를 구하기 위한 연구를 시작하였고, 1928년 미국의 NFPA의 제조 위험 및 특수 위험 위원회(Committee on Manufacturing Risks and Special Hazards)에서는 이산화탄소 소화 시스템에 대한 논의를 시작해서 그 결과 NFPA-12코드를 부여해 1929년 이산화탄소 소화 시설에 대한 표준으로 채택되었다.

2. 분말소화약제

(제1종 분말: 탄산수소나트륨) 19세기 등장한 베이킹 소다와 베이킹 파우더의 주재료인 탄산수소나트륨은 오랜 열 반응 시 이산화탄소와 물을 생성해 빵, 케이크를 부풀게 했다. 탄산수소나트륨은 미세한 분말로 불을 끄는 성질이 있었으며, 특히 물로 끄기 어려운 지방질의 불을 끄는데 효과가 있다는 사실이 발견되었다. 탄산수소나트륨이 기름과 반응하여 비누처럼 변해 질식소화의 효과가 있었다. 다만, 탄산수소나트륨을 소화약제로 사용하기에는 너무 잘 굳어, 무엇보다 흡습성을 해결하는 것이 선결 과제였다. 1920년대 들어와 미국에서 탄산수소나트륨에 스테아린산 마그네슘을 첨가해 분말의 흡습성을 줄이고 뭉치지 않도록 한 분말 소화기가 두-가스 엔지니어링(Du-gas engineering)에 의해 제조·판매되었다. 두-가스 엔지니어링의 소화기는 두개의 금속 용기로 구성되어 있어 한 개의 용기에는 분말소화약제가, 다른 용기에는 압축 이산화탄소가 들어있었다. 이산화탄소의 압력이 관으로 연결 되어있는 다른 용기의 분말소화약제를 밀어내는 방식으로 동작하는 소화기로서 고압용기의 크기가 커 바퀴를 달아 산업현장에서 사용할 목적으로 만들어졌다.

(제2종 분말 : 탄산수소칼륨) 2차 세계대전을 치르면서 항공기의 사고와 항공기에서 누출된 연료의 화재에 대응하는 방안 마련은 고가의 장비를 위해 고려해야 할 중요한 문제였다. 미국에서는 항공기와 시설물, 유류가 복합적으로 관련되는 유형의 화재에 대응하기 위해 탄산수소나트륨 계열의 분말소화약제를 사용하고, 연료의 화재에는 유면을 두꺼운 거품층으로 덮을 수 있는 단백질 계열의 소화약제를 혼합해서 사용하는 방안을 적용하려했다. 그러나 두 약제의 혼합해서 사용할 때 건조분말약제의 화학적 성질이 단백질 거품을 파괴하는 예상치 못한 결과가 도출되었다. 1959년 미국 해군연구소(Naval Research Laboratory: NRL)는 다양한 연구와 실험을 거쳐 기존의 탄산수소나트륨에서 나트륨을 칼륨이온으로 대체했을 때 불꽃억제효과가 2배 증가하는 것을 발견하고 탄산수소칼륨을 주원료로 사용한 분말소화약제를 만들게 된다. 이 분말약제는 퍼플-K(PurpleK-Powder, PKP)라고 이름이 붙여졌다. 퍼플-k는 나트륨보다 2배정도 반응성이 큰 물질인 칼륨을 주원료로 사용함으로써 탄산수소나트륨의 2배, 이산화탄소의 4배 정도의 뛰어난 소화능력을 보였으며, 유류화재인 B급에 효과적이고 전기 화재인 C급 화재에서도 적응성이 좋았다. 퍼플-k는 인화성 액체 화재에 특화된 물질로 미국 소방방화협회에서 공항에서 발생하는 화재에 사용하는 소화약제로서 인정되었으며, 미 해군을 시작으로 미국 전역의 산업용 소화약제로 확산되었다.

(제3종 분말 : 인산암모늄) 탄산수소나트륨, 탄산수소칼륨을 주성분으로 하는 분말소화약제는 유류화재와 전기화재에 적응성이 있었지만 일반적인 화재에는 효과적이지 않았다. 미국 국립 산림청에서는 도로망이 부족한 야생상태 산림의 화재에 대응하기 위해 항공기를 활용한 화재진압을 위해 여러 방안을 실험했다. 항공기에 물을 실어 화재장소 인근에서 투하하는 방안을 실험한 결과 나무의 윗부분과 개활지에서는 효과적이었지만 나무의 윗부분에 가려져 물이 도달하지 못하는 관목이나 표면적이 넓어 화재를 빠르게 옮기는 덤불에는 효과적이지 못했다. 산림청은 항공기에 물대신 적재할 소화약제로서 분해가 되면 인과 질소가 되는 안정적인 물질인 인산암모늄을 물을 대체할 소화약제로 고려했다. 인산암모늄 실험결과 비교적 작은 양으로도 화재가 진압되었으며, 가연물 위에 유리질의 코팅이 있어 재발화를 막는 것을 발견하게 되었다. 여기에 더해 인산암모늄은 열에 불안정한 물질로 화재장소에서 열분해되는 온도에 따라 인산과 결합하는 물 분자수가 달라져 메타인산, 피로인산, 오르토인산으로 변하게 된다. 이 중 오르토인산은 나무, 종이와 같은 섬유질에서 탈수 작용을 하고, 메타인산은 물질의 표면에 유리질의 피막을 입히는데, 이 생성물들은 가연물을 난연화시키고 산소공급을 차단해 재발화를 막는 효과가 있었다. 인산암모늄 분말은 이처럼 재가 남는 가연물의 화재인 A급과 유류화재인 B급, 전기화재 C급 화재 모두에 적응성이 있어 ABC급 소화약제로 불린다.

II. 할론소화약제와 대체소화약제

1. 할론소화약제

1960년대에 들어서며 컴퓨터와 저장장치, 통신설비 등 전산기기를 화재로부터 보호해야했다. 또한 박물관의 소장품 역시 화재를 포함한 여러 위험요소들을 통제범위에 두어야 할 필요가 있었다. 할론소화약제의 특성은 여기에 부합했다. 하지만 1970년 질소 산화물이 성층권에 있는 오존을 연쇄적으로 파괴한다는 내용의 논문이 발표 되고, 1973년에는 염소불화탄소(CFCs)가 오존층을 파괴한다는 논문도 발표되었다. 때마침 남극 지역의 오존층이 파괴 중인 것이 영국에 의해 확인되었다.
오존층 파괴는 과도한 자외선 복사로 사람들의 피부암 발병률을 높이고 식물과 동물의 생명에도 영향을 미칠 것 이라는 우려가 높아 1987년 몬트리올 의정서 채택 당시 규제 대상물질이 되었다. 국내에서는 2010년부터 생산·판매가 금지되었다.

프레온가스의 냉매, 할론약제 사용으로 오존층 파괴(그림2)
프레온가스, 할론약제 오존층 파괴의 원인
염소불소탄소(CFCs) 사용증가로 오존량 감소

2. 할로겐화합물 및 불활성기체

1996년 미국 소방방화협회 NFPA에서는 첫 번째 청정제 표준인 NFPA2001을 발표하고 11개의 청정제를 인정하였다. 할론 소화약제 대체 소화약제에는 오존층을 손상시키는 염소, 브롬 대신 불화탄소, 수소불화탄소 화합물이 중심으로 쓰였다.
우리나라에서는 2004년 6월 4일 고시인 화재안전기준으로 ‘청정소화약제소화설비의 화재안전기준(NFSC 107A)’이 시행되었다. 당시 우리나라의 화재안전기준에서 정한 청정소화약제는 할론1301, 2402, 1211을 제외한 불소, 염소, 브롬 또는 요오드 중 어느 하나 이상의 원소를 가진 할로겐 화합물, 헬륨, 네온, 아르곤 또는 질소 중 어느 하나 이상의 원소를 기본 물질로 하는 불활성기체이며, 비전도성으로 휘발성 등에 사용 후 증발되어 잔여물을 남기지 않는 소화약제로 정의했다. 2018년 6월 27일 ‘청정소화약제’라는 명칭이 잔여물이 남지 않는다는 본래 의미대신 인체 및 환경에 무해하다는 뜻으로 오해될 소지가 있어 ‘할로겐화합물 및 불활성기체 소화설비’로 명칭이 변경되어 화재예방 소방시설설치유지 및 안전관리에 관한 법률 시행령이 개정되고 고시인 ‘청정소화약제소화설비의 화재안전기준(NFSC 107A)’이라는 제명 역시 ‘할로겐화합물 및 불활성기체소화설비의 화재안전기준(NFSC 107A)’로 명칭이 변경되었다.

맺음말

가스계 소화약제는 산업의 발전에 따라 새로운 유형의 화재와 이에 따르는 화재진압 수단에 대한 요구로 발전해 왔다. 지금까지 가스계 소화약제에 대한 변천사를 보았듯 소화약제는 산업을 선도하는 기술이 일단 등장한 이후 해당 산업에서 부작용으로 발생하는 특유한 유형의 화재를 진압하는 발명이 지속되었다. 모든 화재에 만병통치약처럼 통용되는 소화약제는 없다. 각 산업에 적합한 소화약제일지라도 그 소화 성능, 경제성, 환경ㆍ인체유해성을 모두 만족하는 소화약제 역시 존재한 적이 없다. 국가와 관련업체를 중심으로 소화특성은 물론 경제성, 환경과 인체영향을 고려한 다양한 소화약제 연구가 지속적으로 필요하다고 본다.

글. 서주완(중앙소방학교 예방안전학과 전임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