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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로 현장의 비상 대피 안전 체계를 바꾼
태국 케이더 장난감 공장 화재와 부산 국제고무공장 화재

현재 의무적으로 시행하는 비상구 상시 개방과 스프링클러 설치는 무려 1990년대 초까지 당연한 조건이 아니었다. 더 나아가 당시 산업현장에선 일부러 화재경보기를 꺼두거나 심지어 제대로 작동했을 때조차 전 직원이 제자리를 지키도록 지시하기가 다반사였다고 전한다. 그런데 이처럼 안이한 대처로 인해 대형 사고가 심심치 않게 발생하면서 세계 각국이 자성의 목소리를 높였고, 서서히 긍정적인 변화가 이뤄졌다. 특히 태국 케이더 장난감 공장 화재와 부산 국제고무공장 화재는 유사한 작업 환경과 막대한 인명 피해, 그리고 비상 대피 안전 체계를 바꾸는 계기로 작용했다는 점에서 대표적인 국내외 화재 사례로 손꼽힌다.

인형을 훔칠지 모른다는 우려가 크나큰 희생으로 이어져

태국 중부 나콘빠톰 주에 자리한 케이더 장난감 공장(Kader Toy Factory)에선 매일같이 전 세계 어린이의 꿈과 행복이 탄생하고 있었다. 글로벌 팬층이 두터운 디즈니사의 가지각색 봉제 인형과 유명 완구 회사인 마텔에서 선보이는 심슨 가족 플라스틱 인형에 대한 발주를 받아 제작하고 있었던 까닭이다.
그런데 정작 이곳 처우는 희망을 찾아보기 어려웠으며, 가장 기본적인 안전 역시 거리가 멀었다. E자형 4층 건물 2~4층은 작업장이었는데 일과가 이뤄지는 동안엔 모든 문을 밖에서 걸어 잠갔다. 직원 대다수가 가난한 살림을 조금이나마 일으키기 위해 일하러 나오는 만큼 주머니 사정이 좋지 않은 터라 몰래 인형을 훔쳐 나갈지 모른다는 이유에서였다.
더군다나 천과 솜, 플라스틱 등 불이 잘 붙는 재료가 가득한 공간엔 온갖 위험 요소가 도사리고 있었다. 우선 천장을 지탱하는 골조는 비용이 저렴한 대신, 열에 취약해 만약 화재가 발생하면 그대로 주저앉기 십상이었다. 건물 설계도에 공공연히 나와 있는 비상구는 실제로 존재하지 않았으며, 스프링클러와 화재경보기 등은 작동을 멈춘 지 오래였고 소화기마저 비치하지 않았다. 전반적인 여건으로 미뤄보건대, 다가올 비극은 충분히 예측 가능했던 셈이다.

케이더 공장 화재 현장/ 출처: 태국경제신문(ที่มาภาพ :นสพ.กรุงเทพธุรกิจ ฉบับวันที่ 28 ธันวาคม 2536)

“화재 예방 설비가 없는 공장은 개선 혹은 폐쇄 조치하라”

결국 1993년 5월 10일 오전 10시, 태국 역사상 가장 많은 목숨을 앗아간 사고가 일어났다. 완제품과 자재를 저장하는 창고에서 직원이 피운 담배가 화근이었다. 꽁초의 작은 불씨가 화학섬유에 옮겨 붙으면서 삽시간에 크게 번져 공장 일부를 휘감았다. 그러나 급박한 사태와 달리 화재 경보는 울리지 않았으며 모든 근로자는 그저 단순한 소란이니 계속해서 작업하라는 지시를 받았다.
한편 발화 장소이자 엄청난 불길과 연기를 가장 먼저 목격하고 대피를 시도한 1동에선 뒤늦게 주 출입구가 잠겼다는 사실을 확인했다. 나갈 방법을 찾지 못해 당황한 인파가 몰리는 순간, 무게를 지탱하지 못한 비상계단은 그만 무너지고 말았다. 동시에, 내려가지 못하고 우왕좌왕하던 3~4층에선 창문으로 뛰어내리면서 중상을 입거나 사망하는 사례가 잇달았다.
자체적으로 해결하지 못한다는 점을 인지하고 지역 소방서에 신고한 시점은 이미 1동이 붕괴하기 직전인 오후 4시 20분쯤이었다. 다행히 2~3동은 불이 채 닿기 전에 경보기가 울려서 전원 대피했지만, 결과적으로 소방대가 진화작업을 마쳤을 땐 4동을 제외한 나머지는 잿더미로 변해버렸다. 총 469명이 부상당했으며, 188명은 잔해 속에 갇혀 세상을 떠난 탓에 유해 수습이 2주 이상 걸렸다.
전무후무한 사고 소식에 당시 총리인 추안 릭파이(Chuan Leekpai)는 당일 저녁 직접 현장을 방문하고 월스트리트 저널 인터뷰를 통해 안전법 위반에 대한 엄격한 조치를 강조했다. 또, 사난 카쫀프라삿(Sanan Kachornprasart) 산업부 장관은 화재 예방 설비와 시스템이 없는 공장은 개선 혹은 폐쇄를 선택해야 한다고 강하게 답했다.
아울러 3년 뒤인 1996년 4월 28일, 뉴욕 유엔 본부에서 열린 지속가능한 발전위원회는 사고 희생자를 추모하는 촛불을 켰고, 국제노동기구(ILO)는 행사일을 기념해 세계산업안전보건의 날로 지정 ‧ 운영하고 있다. 더불어 산업계에선 비로소 소방설비 구비를 비롯해 비상구 마련, 피난 우선 등에 관심을 쏟기 시작했다.

부산 국제 고무공장 / 출처: 한국학중앙연구원(www.aks.ac.kr)

멋모르고 한 성냥불 장난, 최악의 근로 환경에 경종을 울리는 사건으로

우리나라 근현대기 최악의 산업재해로 불리는 부산 국제고무공장 화재는 케이더 장난감 공장 화재보다 무려 30여 년 먼저 발생했다. 이름에서 알 수 있다시피 운동화를 비롯한 각종 신발 밑창 등과 같은 고무 소재를 다룬 이곳은 평상시 본드나 인화성 물질인 톨루엔 접착제 증기로 꽉 차 있어 자칫 자그마한 스파크에 폭발할 우려가 있었다.
또한, 전체 약 300명이 일하는 공장에서 환기가 전혀 이뤄지지 않았고, 사용할 수 있는 출입구 역시 4개 중 2개에 불과했다. 훗날 조사한 바에 따르면 앞선 사례와 마찬가지로, 완제품 절도를 예방하는 차원에서 공장의 출입문을 모두 닫아놓았다. 더불어 위아래 층을 연결하는 계단과 바닥은 불에 쉽게 타는 나무 제작되어 일정 하중 이상은 견딜 수 없었다.
이러한 가운데 1960년 3월 2일 오전 8시경, 전체 건물 중 제2공장 2층 접착 작업 부서에 새로 입사한 여공이 작업대 위에 있던 성냥을 딱, 그었다. 별다른 앙심이 있었다기보다는 멋모르고 한 장난이었다. 만약 미리 주의사항을 전달받았거나 오늘날처럼 화재 예방 교육을 시행했다면 분명 달랐을 테다. 그러나 황급히 제지하는 동료 직원으로 인해 놀라 엉겁결에 연료통에 버리면서 순식간에 불난리가 일어났다.

신발제조작업장 / 출처: 부산역사문화대전

고무공장 큰 애기가 떠난 뒤에 등장한 인화성 물질 관리와 비상 대피에 관한 법

갑자기 난 화재는 유독가스를 내뿜으며 활활 타올랐다. 자연히 모든 직원이 대피를 위해 일단 1층으로 내려가려고 폭 1m가량의 좁은 문에 일제히 모여들자 넘어지고 밟히는 혼란이 생겼다. 또, 겨우 버티던 계단과 바닥이 맥없이 무너지면서 근로자 50여 명은 3m 아래로 추락했다. 그 가운데 관리감독자는 오히려 진입로를 막아서고 화마를 진압하라며 폭력을 행사해 탈출을 지연하기에 이르렀다.
단 3시간 만에 전소한 1,980㎡(600여 평) 규모 공장은 1억 환(현재 환산액 10억 원)의 재산 피해를 냈으며, 62명이 숨지고 39명이 중경상을 입는 등 사상자는 100명에 달했다. 특히 건물이 위치한 부산진 시장은 골목이 비좁고 왕래가 잦아서 소방차 출동에 시간이 오래 걸린 탓이 컸다.
놀라운 점은, 실수의 대가로는 너무 큰 과실을 제공한 여공은 중실화 혐의로 구속했는데 정작 문제 원인을 방관한 대표와 관리자에 대한 처벌은 따로 없었다는 데 있다. 근로자의 안전과 보건에 관한 사용자 의무가 지난 1953년 제정한 「근로기준법」에 드러나 있으나 아직 세부 법령이 존재하지 않았기에 적용하기가 어려웠기 때문이다.
물론 지역 경제를 책임질 만큼 거대한 기업이 화재에 관한 지침을 규정하고 실천하지 않아 창창한 청춘을 궁지로 내몰았으니 비난이 쏟아질 수밖에 없었다. 이 사건을 모티브로 한 가수 남인수의 <한 많은 네 청춘>이란 가요에서‘열아홉 꽃봉오리 눈물의 부산 처녀 고무공장 큰 애기’는 바로 희생자를 뜻한다.
사회적으로 재발 방지와 각성의 의미를 상기하는 사건이었다. 1962년 5월 7일 사업장에서의 인화성 물질 관리와 대피 우선 등에 관한 내용을 담은 근로안전관리규칙이 생겼고, 같은 해 8월 8일 시행하면서 화재에 대처하는 시각은 크게 달라졌다.

글. 오민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