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난사고 재조명
화재사고, 더 이상 강 건너 불구경이 아니다. 전 세계 곳곳에서 일어난 화재사고가 이를 증명한다. 올해도 마찬가지였다. 2017년 화재사고의 주요 키워드는 ‘초고층건축물’과 ‘다중밀집지역’이었다. 산업사회의 발달로 건축물 고층화 및 인구 밀집화가 심화되면서 이에 따른 부작용이 속출하고 있는 것이다. 실제로 초고층건축물에서 화재가 발생하면 수직 이동거리 증가로 전원 대피에만 1시간 이상이 소요된다. 또 소방재난 대응 전략상 20층 이상의 건축물에는 신속한 대처가 불가능해 인명 안전에 대한 위험도 높다. 즉 각종 재난사고에 무방비로 노출돼 있는 셈이다.
2017년 6월 14일, 전 세계를 떠들썩하게 했던 화재사고가 있었다. 일명 ‘런던 그렌펠타워 화재’. 이날 새벽 1시경 런던 서부에 있는 그렌펠타워(Grenfell tower)에 불길이 치솟기 시작했다. 이곳은 지상 24층 규모로 약 600명이 거주하고 있었다. 불은 4층 입주민의 냉장고에서 발화됐다. 이후 건물 외장재에 옮겨 붙었고, 화재 경보가 울린 지 1시간도 채 지나지 않아 건물 전체를 집어삼켰다. 당국은 화재 진압을 위해 대규모 소방대원들을 투입했다. 하지만 20층까지 진입하는 데만 한나절이 걸렸다. 결국 수많은 사람들이 목숨을 잃고 말았다. 인근 주민 수십 명 또한 유독가스에 노출돼 병원에서 치료를 받았다. 화재 원인으로는 ‘가연성 외장재’가 지목됐다. 건물 리모델링 당시 내화성 외장재를 사용하려던 계획과는 달리 예산 절감을 위해 가연성 외장재로 교체했다. 안전보다 비용 절감에만 치중해 화를 키우게 된 꼴. 여기에 초고층건축물과 다중밀집지역이라는 점도 한몫했다. 초고층건축물에 화재가 발생하면 굴뚝 효과로 인해 불이 걷잡을 수 없을 정도로 빠르게 번져간다. 또 대비 면적에 비해 인구분포도가 높아 피해가 더욱 커질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한국도 예외는 아니다. 한국은 중국, 미국, 아랍에미리트에 이어 세계 4위의 초고층건축물 보유 국가다. 국내 30층 이상 빌딩은 1994년에 7채에 그쳤지만, 2015년에서 1,478채로 늘었다. 급기야 지난해에는 2,541채로 1년 만에 배로 늘었고, 올해는 이미 3,021채를 넘어섰다. 겉으로 보기에는 괄목할 만한 경제성장이다. 하지만 깊게 들여다보면 대형화재의 불씨를 안고 있는 것이나 다름없다.
국내에서도 ‘런던 그렌펠타워 화재’를 연상케 하는 사건들이 여럿 있었다. 2010년 부산 해운대 주상복합 화재사건이 그렇다. 당시 4층에서 난 불이 38층까지 옮겨 붙는데 걸린 시간은 불과 30분이었다. 올해도 있었다. 2017년 2월 4일, 경기도 화성시 동탄 메타폴리스에서 화재가 발생했다. 메타폴리스는 지상 66층 규모로 도내에서 가장 높은 건물이다. 주거동의 경우 66층 2동과 60층, 55층 각각 1동의 구조로 이뤄져 있다. 발화 지점은 초고층건축물 내 3층에 위치한 어린이놀이시설(뽀로로파크)였다. 다행히 주거동까지 불이 번지지는 않았지만 인명피해는 피해 갈 수 없었다. 이 사고로 4명이 숨지고 47명이 부상을 입었다.
화재 원인은 현장에 가스통과 용접기 등이 발견된 점을 미뤄 철거 작업 도중 스파크가 났을 가능성에 무게를 두고 있다. 실제 어린이놀이시설은 불과 80평(264㎡) 규모 밖에 되지 않았다. 그런데 왜 사상자는 51명에 달했을까. 그 이유는 바로 실내를 연출하는데 쓰인 인테리어 소품에 있었다. 대부분 스티로폼 등 가연성 소재로 제작돼 화재 발생 당시 엄청난 연기와 유독가스가 뿜어져 나온 것이다. 확산을 차단할 방화셔터를 비롯해 화재경보기 등 방재시설 마저 전원이 차단돼 있었다. 유독가스는 미로처럼 연결된 복도를 타고 확산돼 인명피해를 더욱 키웠다.
우리나라는 초고층건축물에서 화재가 발생하면 속수무책으로 당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다. 전국 소방서들이 보유 중인 사다리차는 모두 435대. 이 가운데 건물 25층까지 직접 진압할 수 있는 장비는 굴절사다리차(70m) 단 2대다. 사실상 초고층건축물에서 화재가 발생한다면 외부에서 유효한 화재진압활동이 불가능하단 뜻이다. 소방관이 직접 건물 옥상이나 고층으로 진입해 화재를 진압하는데도 한계가 있다. 실제 2013년 현장훈련에서 소방관이 20kg 공기호흡기를 메고 계단을 걸어 67층 화재현장에 도착하는데 22분이나 걸렸다. 하지만 고가의 소방장비만을 늘린다고 능사가 아니다. 철저한 소방점검과 관계인의 안전의식 그리고 반복된 훈련이 선행되지 않는 한 초고층건축물은 계속해서 살아있는 화약고일 수밖에 없다.
비단 초고층건축물만의 문제는 아니다. 전통시장이나 백화점, 영화관 등 내부의 유동인구가 수천 명에 달하는 곳 또한 화재위험지대로 볼 수 있다. 특히 전통시장의 경우 건물 밀집도가 높고 출입구와 통로가 좁아 화재 발생 시 초기 진압을 못한다면 대형 참사로 이어질 가능성이 높다. 2017년 1월 15일, 대형화재가 발생했다. 전남 여수시 교동 수산시장에서 불이 난 것. 2시간여만에 진화됐지만, 피해는 상당했다. 전체 125개 점포 가운데 116개가 불에 타거나 그을리면서 무려 70억 원의 재산 손실을 남겼다. 악몽이 가시기도 전 또다시 전통시장에서 불이 났다. 2017년 3월 18일 인천 남동구 논현동 소래포구 어시장에서 화재가 발생했다. 이 사고로 내부 좌판 220여 개와 인근 횟집 20여 곳 등이 잿더미가 됐다. 추산 피해액은 6억 5,000만 원에 달하는 것으로 알려졌다.
주요 화재 요인은 ‘전기’였다. 여수 수산시장의 경우 한 횟집에서 전기 배선이 끊어지면서 불이 났을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인천 소래포구 어시장은 현장에서 불에 녹아 끊어진 전선 여러 개가 발견된 점으로 미뤄 누전으로 인한 화재로 잠정적 결론을 냈다. 두 화재사고 모두 소방차가 도착하는데 걸린 시간은 10분 남짓이었다. 하지만 불길은 걷잡을 수 없이 커져만 갔다. 전통시장 특유의 밀집형 구조 때문이었다. 생선이나 상품을 담는 데 쓰이는 스티로폼, 플라스틱 등 인화성 물질이 불을 더욱 키웠다. 가판대와 건물 외벽의 불길은 비교적 빠르게 잡혔지만 잔불을 정리하는 과정에서 2시간 가까이 소요된 것도 이 때문이다.
재산 피해를 남겼다. 전통시장은 일단 화재가 발생했다 하면 대형화재로 확대되는 것이 특징이다. 대부분의 건물들이 오래되거나 밀집돼 있고, 가연성 물질들이 곳곳에 도사리고 있기 때문이다. 시민 의식도 빼놓을 수 없다. 주변의 불법 주정차 차량으로 인해 소방차의 접근이 어려워 초기진압에 실패하는 경우도 빈번하게 발생하고 있다. 전통시장의 현대화로 시설과 안전이 개선되고 있다고는 하지만 아직도 대형화재의 사각지대라 할 수 있다.
유비무환(有備無患)이라는 말이 있다. 미리 준비가 돼 있으면 걱정할 것이 없다는 뜻이다. 개인의 행복과 자유가 보장되려면 무엇보다도 안전한 사회가 기반이 되어야 하고, 이를 위해서는 화재와 같은 위험을 미리 대비하고 예방하는 것이 선행되어야 한다. 화재사고는 설마 하는 순간에 모든 것을 잃을 수 있다. 하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은 이를 공감하지 못하고 여전히 안전불감증 속에 살아가고 있다. 이제는 우리 모두가 달라져야 한다. 예방의 필요성을 반드시 인지하고 자발적인 참여도 필요하다. 화재사고는 예방만이 살 길이다.
제천 스포츠센터 화재 참사’는 명확한 사고 원인과 문제 규명을 위한 소방청 주관 ‘소방합동조사단’발표에 근거하여 추후 발간예정인 제6호에서 자세히 다루도록 하겠습니다. 삼가 고인의 명복을 빕니다.
글. 소방안전플러스 편집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