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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난약자를 지키는 안전이 곧 복지다

재난약자 이용시설의 피난 안전 대책과 전략

안전은 실천으로 완성한다. 그러나 고도의 압축 성장과 함께 국민소득 3만 불 시대를 맞이하며 대한민국이 터트린 축하의 샴페인은 안전의 기본과 원칙에 충실하지 못한 우리의 눈물로 돌아왔다. 철저히 대비했다면 충분히 막을 수 있었던 안타까운 화재가 발생할 때마다 ‘더 이상 안된다’는 반성과 대책이 쏟아졌지만, 언제 그랬냐는 듯 번복하는 사고는 우리 사회의 안전불감증이 여전히 뿌리 깊다는 걸 상기시킨다. 이는 특히 대응에 취약한 재난약자를 감당하기 어려운 상황으로 몰고 갈 우려가 있다.

누구보다 보호가 필요한 재난약자, 위급상황에선 오히려 뒷전?

지난 2016년 여성가족부가 재난안전 관련 법령에 ‘재난(재해)약자’라는 개념을 도입해야 한다고 권고한 지 올해로 3년이란 시간이 흘렀다.

본질적으로 화재에 대한 대응이 어려운 재난약자는 말 그대로 재난으로 인한 피해와 회복에 있어 상대적으로 취약한 사람을 지칭한다. 즉 영유아와 어린이, 장애인, 언어가 서툰 외국인이나 다문화가정 구성원, 노인, 환자 등 위급 상황에서 타인의 도움이 절대적으로 필요한 이들이 주 대상이다.

그런데 그간 국내에서 일어난 각종 사고에선 오히려 재난약자가 뒷전이다. 2010년 일어난 포항 요양원 화재는 10명의 희생자가 나왔고, 2014년 전남 장성 요양병원 화재에선 21명이 세상을 떠났다. 사망자 대다수가 치매나 중풍으로 거동이 어려운 노인인 점을 고려하면 화마 앞에서 속수무책이었던 그들의 절망을 감히 헤아리기 어렵다.

유치원생 19명을 하늘로 떠나보낸 1999년 경기 화성 씨랜드 화재 역시 결코 잊어선 안 될 사고 가운데 하나다. 아이들의 목숨을 앗아간 원인인 컨테이너는 본디 화물 수송이 주목적이다. 이 같은 ‘가짜 집’에 어린 생명을 꼭 머물게 해야 했는지 생각해보면 참담하기 그지없다.

이러한 비극을 겪고 난 다음에야 바로 면적과 관계없이 스프링클러를 설치하도록 하는 등의 후속 대책이 탄생했다. 허나 법이 바뀌어도 실천이 따르지 않으면 소용없는 법이다. 지난 9월 49명의 사상자를 낸 경기 김포요양병원 화재 현장의 스프링클러는 불길에 작동하지 않았다.

안전 실천과 실질적 인센티브가 함께하는 미국형 윈-윈 전략이 주는 교훈

앞서 소개한 개념에 따르면 어린이집, 양로원, 요양병원, 각 지역자치단체에서 운영하는 사회복지시설 등은 대표적인 재난약자 이용시설로 분류할 수 있다. 이 같은 시설이 안고 있는 고민은 ▲구성원 대다수의 자력 대피 능력 미숙 ▲수용인원에 비해 턱없이 부족한 관리 인력 ▲(어린이나 치매 노인의 경우) 화재 초기에 적절한 판단을 기대하기 어려운 여건 등이다.

그렇다면 미국과 같은 안전 선진국은 해당 문제점에 대해 어떻게 대처하고 있을까. 우선 재난약자 이용시설에 대해선 보다 꼼꼼하고 엄격한 기준을 적용한다. 미국방화협회(National Fire Protection Association, 이하 ‘NFPA’)의 101번 기준인 인명안전코드(NFPA 101, Life Safety Code)와 국제빌딩코드(International Building Code)가 대표적인 가이드라인이다.

여기엔 건물 설계를 비롯해 ▲재난약자 거동 특성을 고려한 대피 동선과 공간(Refuge Area) 마련 ▲제연설비와 스프링클러를 포함한 각종 소방시설 설치 ▲정기적인 관계자 교육과 대피 훈련 등에 대한 균형 잡힌 내용이 담겨 있다.

지난 9월 주한 미 공군 오산기지에서 한 무리의 미국 초등학교 학생들이
대피 훈련을 마친 뒤 미국 소방마스코트인 스파키(Sparky)와 함께 기념 촬영을 하고 있다.

또, 유치원과 학교 대다수는 월 1회의 대피 훈련을 의무화하고 있는데 이는 해당 교육기관이 재인증을 받기 위한 필수 요건이다. 정기적인 소방 훈련은 안전을 챙길 뿐 아니라 지역에 따라 보험료 할인 혜택을 받을 수 있다.

더불어 일부 요양원은 침대에 센서를 달아 화재 경보가 울리면 매트리스를 진동 시켜 환자가 도움을 요청하게 돕는다. 이처럼 신속한 대피를 지원하는 장비는 위급 상황에 힘을 북돋워 준다.

안전 실천과 이에 따른 합리적 인센티브 제공이라는 소위 ‘미국형 윈윈(Win-Win) 전략’이 결과적으로 소중한 인명과 재산을 지키는 기본으로 작용한다는 사실은 우리에게 시사하는 바가 크다.

대피 동선 확보, 시설 직원 교육과 훈련 등의 효과적 전략이 절실

최근 소방청과 한국소방안전원에선 ‘불나면 대피 먼저’ 캠페인을 활발히 전개하고 있다. 화재 초기에 신속히 대피해 질식 피해를 막고, 무분별한 화재 진압이 야기할 수 있는 2차 피해를 예방하는 차원에서 시행하는 조치다. 이러한 취지로 미뤄볼 때 재난약자 이용시설의 효과적 대피계획과 실행은 필수적이다.

주한 미 공군 오산기지 내 기숙사 내부에 부착한 표지판.
화재 발생 시 엘리베이터를 타지 말고 계단을 이용하라는 안내 문구가 붙어있다.

주지하다시피 우리 주변엔 도움이 필요한 재난약자가 많이 있다. 더욱 확대해서 해석하면 ‘재난 상황에서 어찌해야 할지 모르는 사람’ 모두가 여기에 속할 수 있다. 대부분의 재난 상황에선 신속한 대피가 무엇보다 중요하다. 그러나 그에 앞서 평상시 모두가 함께 참여하는 예방 대책의 실천을 선행해야 한다.

주요 전략은 ▲재난약자의 특성을 고려한 대피 동선 확보 ▲전문가 안전컨설팅 제공 ▲전 직원 참여 교육과 훈련 ▲다문화가정 구성원을 위한 언어 지원 ▲자원봉사자를 비롯한 안전인력 확보 ▲소방시설 정기 점검 등이다.

안전은 운이 아닌 체계적 시스템으로 보완해야

거듭 강조하지만, 국민의 안전권은 더 이상 타협의 대상일 수 없다. 규제 완화나 경제 활성화라는 명목으로 최소한의 안전만 규정하고 그마저 잘 지키지 않는다면 높은 국민소득이 무슨 의미일까.

안전을 체계화한 시스템으로 보완하기보다 운이나 재수에 기댄다면 우리 안전의 현주소는 여전히 저 멀리 뒤처져 있다고 단언할 수 있다. ‘재난약자에 대한 안전이 곧 복지’라는 소중한 가치가 현장에서 빛날 때, 비로소 샴페인을 터트려도 좋을 것이다.

지난 11월 3일, 서울에서 개최한 한 스포츠 경기에서
휠체어를 탄 일본 선수의 대피 동선을 안내한 뒤 함께 기념 촬영한 필자

글. 이건 ∣ 주한 미 공군 오산기지 선임소방검열관, 소방 칼럼니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