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으로 바로가기 대메뉴로 바로가기 바닥글 바로가기

시간이 남긴 위대한 유산,
불길 속으로 사라지다

화재로 인한 문화재 손실이 남긴 예방의 중요성

지난 10월 화마에 휩싸인 슈리성 / ⓒNHK

수 세기에 걸쳐 한 자리를 지켜왔으나 사라지는 데는 불과 몇 시간밖에 걸리지 않았다. 지난 4월 프랑스 노트르담 대성당(Notre-Dame de Chartres)에 이어 10월 일본 오키나와 슈리성(首里城)이 큰불에 휩싸여 잿더미로 변한 과정이다. 이처럼 안타까운 비극은 일찍이 화마에 의해 무너진 숭례문을 지켜봐야 했던 우리에게 화재 예방의 중요성을 다시금 일깨운다.

화재에 직면한 노트르담 대성당의 유물이 무사할 수 있었던 비결

노트르담 대성당의 전경 / ⓒPixabay

800여 년의 역사와 함께하는 동안 수많은 예술가에게 빛나는 영감을 선사해왔다. 특히 빅토르 위고가 쓴 <노트르담의 꼽추>로 널리 알려지면서 프랑스 파리를 찾는 여행객이라면 반드시 들러야 할 명소로 사랑받았다.

화재가 일어나기 전까지는 프랑스 파리를 대표하는 명소였다 / ⓒPixabay

그런데 올해 봄, 바로 그 노트르담 대성당이 예상치 못한 사고에 직면했다. 현지 시간으로 4월 15일 오후 9시에 첨탑에서 발생한 불이 점차 번지더니 종래엔 지붕을 덮어버린 거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종탑 높이는 최대 69m에 달해 소방대가 접근하기 쉽지 않은 상황이었다. 이에 목재 구조가 모조리 타면서 사태는 악화 일로로 치달았다.

최초로 불이 나기 시작한 첨탑 / ⓒPixabay

천만다행으로, 이미 불길에 휩싸인 상층부를 아치형 석조 천장이 떠받히고 있어 열기가 내부에 침투하지 못하고 있었다. 이때를 틈타 소방당국과 성당 사제, 그리고 시민들이 손에 손잡고 사슬을 만들어 거의 박물관이나 다름없는 건물 내에서 각종 문화재를 구해냈다.

급박한 조건 속에서 당황하지 않을 수 있었던 비결은 정부가 비상상황에 대비해 미리 유물에 매긴 중요도 순위였다. 따라서 어떤 게 더 중요한지 허둥지둥 헤매면서 시간 낭비하지 않고 스테인드글라스 장미창, 가시면류관, 루이 9세의 튜닉 등을 찾아 순서대로 내보낼 수 있었다.

원래 한창 첨탑 복원 공사를 진행하던 곳이 화재 현장으로 바뀌었다 / ⓒCNN

한편 외부에선 화재 진압에 최선을 다해 성당의 상징인 전면 탑 두 개를 살려냈다. 그러나 14세기부터 내려온 목조 천장의 전소는 막을 도리가 없었다. 사고 마무리 후에야 원인 확인에 들어갔지만, 목격자 100여 명의 진술을 토대로 살펴도 명확한 이유는 밝혀지지 않았다. 그저 부주의와 전기 결함으로 추정할 뿐이다.

문화유산 손실 외에 후유증 역시 심각했다. 전통적인 방식으로 내부 골조에 쓴 납 300t이 녹아내리면서 주위에 유해 미세 분진이 날려 시민의 건강을 위협했다는 사실이 알려진 바 있다. 또, 피해 본 곳을 온전히 복원하려면 약 8억 5,000만 유로(한화 약 1조 1050억 원)가 필요하며 그나마 설계도면이 남아 있지 않은 탓에 기간은 가늠조차 어렵다.

‘소 잃고 외양간 고치는’ 슈리성의 눈물

류큐 왕국의 화려한 역사가 살아 있는 슈리성 / ⓒWikimedia Commons

노트르담 대성당 화재가 일어난 지 겨우 반년 만에 또 다른 세계문화유산이 위기에 몰렸다. 10월 31일, 주요 건물이 모조리 불길 속으로 사라져버린 슈리성이다.

아름다운 내부의 모습 / ⓒWikimedia Commons

본토에 편입하기 전 독자적인 문화를 구축한 류큐 왕국의 손길이 고스란히 남아 있는 이곳은 마침 축제를 앞둔 터였다. 그런데 준비 기간 중 전기 합선 가능성을 가벼이 여겼고, 새벽에 층별로 전기를 공급하는 분전기에서 불이 나 정전(正殿)을 비롯해 북전(北殿)과 남전(南殿)으로 확장해 나갔다. 화재경보기의 신호로 소방차 30여 대와 소방대원 100여 명이 출동했지만, 기세가 대단해 막기엔 역부족이었고 서원(書院), 쇄지간(鎖之間), 황금어전(黄金御殿), 이층어전(二階御殿) 등 총 6개 동을 재로 만들고서야 멈췄다.

총 6개 동이 타고 나서야 겨우 멈춘 불 / ⓒSankai NEWS

게다가 프랑스의 경우와는 달리 슈리성을 관리하는 재단에서 전체 보물 보관 장소를 파악하고 있지 않아 손해가 막심했다. 이번 사고로 1,510점의 유물이 손상을 입었으며 그 가운데 433점의 염직류, 회화, 칠기 등은 아예 전소했다. 반면 남전 수장고는 무사해서 보존 처리를 진행할 수 있었다.

화재가 일어나기 전(왼쪽)과 전소한 후(오른쪽)의 모습 / ⓒWikimedia Commons

70억 엔(한화 약 74억 5,200만 원) 규모의 화재 보험에 가입했다고는 하나 복원은 쉽지 않을 걸로 보이는 슈리성은 그야말로 때늦은 후회를 하고 있다. 일각에선 19세기에 들어서야 일본에 속한 류큐(現 오키나와 지역)를 푸대접하다가 생긴 불찰이라며 반성의 목소리가 드높을 정도다.

숭례문 화재가 우리에게 전하는 화재 예방의 교훈

2008년에 방화로 인한 화재를 겪은 숭례문은 2013년에야 복원을 마쳤다 / ⓒPixaba

그렇다면 우리나라의 문화재 화재 예방은 어떤 수준에 도달해 있을까. 2008년 초 겪었던 숭례문 화재는 다름 아닌 방화에 의한 사고로, 범인이 ‘원래 타깃이었던 종묘보다 관리가 느슨해 불내기 쉬웠다’고 밝혀 공분을 산 바 있다.

주목을 받기 위해서라면 켜켜이 쌓인 시간의 흔적쯤은 화마로 사라져도 상관없다는 잘못된 생각을 가진 방화범으로 인해 숭례문은 상층 90% ․ 하층 10%가 피해를 입었다. 또, 양녕대군이 남겼다고 알려진 현판은 열기로 약간의 뒤틀림이 생겼다.

완만한 곡선으로 소화용수를 공급해 붕괴를 막아보려고 노력하는 모습 / ⓒPixabay

한편 문화재청과 소방청 간 소통이 이뤄질 여유가 충분치 않아 애써 공급한 소화 용수가 지붕을 타고 흐르기만 했다는 지적이 있다. 내부 화재를 진압하려면 기와를 걷어내야 하는데 유물이기에 임의로 파괴하기 어렵고 접근 역시 불가능했던 까닭이다.

결국 국민들의 애타는 마음을 뒤로하고 자취를 감춘 숭례문은 5년 후인 2013년에 겨우 본모습을 되찾았다. 그러나 오늘날이 있기까지 복원에 필요한 재료와 전문가를 구하는 데 적지 않은 노력을 들여야 했다.

이에 대한 반성으로 우리는 문화재 화재경보기 설치에 만족했던 기존 방식에서 벗어나 최신방재 설비 구축에 나서고 있다. 또, 영상 모니터링 시스템을 수립하고 방재단말기 프로그램을 개발해 재난안전 현장의 24시간 관리 체계를 이뤘다. 더불어 앞서 사고에서 아쉬웠던 목조문화재 설계도면 상호 공유를 통해서 효율적인 공조에 앞장설 계획이다.

그러나 무엇보다 개개인의 안전문화 의식 함양이 문화재 보호와 화재 예방에 큰 원동력으로 작용한다. 이는 시대와 국가를 막론하고 통하는 진리다.

아픔을 딛고 일어난 숭례문의 상층 / ⓒPixabay

글. 오민영(소방안전플러스 편집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