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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들 밭매러 가면 불은 누가 끄나?”

역사상 최초의 소방대를 찾아서

화재, 재난 등의 위기와 마주할 때 우리는 ‘119’를 가장 먼저 찾는다. 그렇다면 소방 체계가 아직 자리 잡히지 않았던 먼 옛날엔 화마의 습격에 어떻게 대응했을까. 역사책 속에선 쉽게 찾아볼 수 없었던 현대 소방서의 조상을 찾아서 지금부터 떠나보자.

과학을 이용해 화재 진압한 인류 최초의 소방대

발명에 몰두하고 있는 크테시비오스(왼쪽)과 헤론이 개선한 소방펌프(오른쪽)

인류 최초의 소방대에 관한 기록은 고대 이집트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그러나 어딘가에 불이 나면 각자 자원해 힘을 모아 진압하는 정도의 기초적인 수준으로 추정할 수 있다. 자기 일이 아니라고 그저 손 놓고 바라보고 있다간 금세 번져 온 도시가 재로 변하는 까닭이다. 다만 놀라운 점이 있다면 알렉산드리아에서 활동한 그리스 출신의 기계학자, 크테시비오스(Ctesibius, BC 285~222)가 처음으로 소방펌프를 고안한 덕분에 비교적 손쉬운 소화가 가능했다는 사실이다. 공기의 압력을 이용해 물을 끌어당기는 방식의 이 발명품은 후대에 과학자 헤론(Heron, BC 120~75)의 손길을 거쳐 개선을 이룬다.

‘돈을 내놓으면 부동산만은 살려주겠다’…수익만 쫓는 야유의 대상으로 전락

현대적인 관점에서 익숙한 정규 편성 소방대는 고대 로마에 이르러서야 드디어 나타난다. 그런데 초창기엔 칭송은커녕 오히려 야유나 조롱의 대상이었단다. 봉사, 희생정신 등을 찾아볼 수 없는 건 물론, 오히려 화재를 빌미로 엉뚱한 이득을 취했기 때문이다.

500명의 사병으로 소방대를 조직한 크라수스

군인이자 정치가이면서 당대 최고의 부자로 통했던 마르쿠스 리키니우스 크라수스(Marcus Licinius Crassus, BC 115~53)는 약 500명의 사병을 모아 소방대를 조직했다. 빠른 정보력으로 별도의 신고 없이 누구보다 빠르게 달려간 그들은 정작 화재 현장에선 마치 놀리듯 불구경만 했다. 이에 애가 탄 집주인이나 건물주가 발을 동동 구르면 크라수스가 흥정을 시작한다. 불을 꺼줄 테니 선불로 화재 진압비를 내거나 터무니없는 가격으로 부동산을 넘기라는 거다. 말하자면 민간 방재업체와 보험사를 결합한 수익형 사업인데 협상 결렬 시 그대로 떠나지만, 울며 겨자 먹기로 응할 경우 해결에 나선다. 그다음 깨끗하게 재건축해 세를 놓는 방식으로 1년 치 국가 예산과 맞먹는 부를 쌓았지만, 현재의 이란인 파르티안으로 원정을 떠났다가 목숨을 잃으면서 소방대 역시 사라졌다.

대화재로 고통 받았던 고대 로마와 화재 진압에 나선 비길레스

재미있게도 로마 5대 황제 네로(Nero Claudius Caesar Augustus Germanicus, AD 37~68)는 여기서 기본적인 틀만 가져와 AD 60년에 로마군 소속의 비길레스(Vigiles)를 창설한다. 국가적 차원에서 소방을 담당하는 이곳은 소방펌프, 고리 달린 로프, 발리스타(Ballistae, 원거리용 전투 무기) 등을 이용해 화재를 막았다. 또, 평소 거리를 순찰하며 화재 예방에 힘썼다.

고의적 방화 막는 중세 수공업자 조합에서 탄생한 자율 소방대

자율소방대의 시초였던 길드(<직물 길드의 감독위원들> 램브란트, 1662)

고대의 화재 대다수가 우연에 의해 벌어졌다면 중세 유럽은 방화로 몸살을 앓았다. 분쟁 시 복수하기 위해 일부러 불을 놓은 탓이다. 다수가 피해를 보는 악화일로로 치닫자 신성로마제국은 제국평화령으로 갈등 자체를 막기 위해 노력하고, 고의적 방화는 민중법으로 엄하게 다스렸다. 또, 즉각적인 대응을 위해 각 지방의 수공업자 조합인 길드(Guild)마다 화재 예방과 진압의 의무를 지도록 명문화했다. 이는 현재 유럽 곳곳에서 활약하는 자율소방대의 시초로 여겨지고 있다.

한창 훈련 중인 파리소방여단

더불어 프랑스에선 1254년 루이 9세의 명으로 왕립 야간경비대(Guet royal)와 시민경비대(Guet Bourgeois)를 나눠 활동하도록 독려했다. 역사상 처음으로 수립한 현대적 의미의 소방서인 파리소방여단이 모습을 드러낸 건 1716년의 일이다.

한편 미국은 남북전쟁이 발발하기 전까지 정부 운영 소방서가 없었다. 대신 각 보험사가 경쟁적으로 만든 민간 소방서의 역할이 도드라졌다. 그러다가 1853년 오하이오주 신시내티에서 정규직 소방관으로만 구성한 최초의 전문 소방서가 문을 열었다.

소방업무의 시작은 금화도감, 현대적 소방관의 등장은 멸화군!

1900년대 궁중 소방대의 완용 펌프 조작 훈련

그렇다면 우리나라는 언제부터 소방대를 조직했을까. 기록에 따르면 1426년(세종 8년), 국내 최초의 독립 소방관청인 금화도감(禁火都監)을 설립했단다. 당시 한성부(현재의 서울) 전체 가옥 가운데 16%가량에 해당하는 2,170채가 전소한 큰 화재를 겪고 인재(人災)에 대비하기로 맘먹은 세종은 다음과 같이 명했다.

성안에 있는 집들 사이에 담장을 높게 쌓아 화재가 일어나면 옮겨붙지 않도록 하라. 성 내엔 도로를 넓게 닦아 사방으로 통행할 수 있도록 하라. 또, 불이 번지지 않게 다닥다닥 붙은 민가는 철거하고 다섯 집마다 하나씩 우물을 파서 화재에 대비하라.

금화도감에 속해 화재 예방과 방재에 힘쓴 금화군은 1467년 일어난 화재를 계기로 재편을 거쳐 멸화군(滅火軍)이라는 명칭을 얻는다. 그간 불을 막는 데만 집중했다면 이제 전문적으로 끄고자 하는 의지를 보인 셈이다. 즉 소방업무의 시작은 금화도감, 현대적 소방관의 등장은 멸화군이라고 하겠다.

글. 오민영(소방안전플러스 편집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