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으로 바로가기 대메뉴로 바로가기 바닥글 바로가기

색다른 소방소식

조금은 특별한 ‘쿠바 소방여행기’

‘소방안전플러스’에서 여러분께 소개할 2곳,


‘쿠바 소방박물관’ ‘아바나 제1특수소방대’입니다.
지도를 참고하세요!

“난 쩌기 모히또 가가지고 몰디브나 한 잔 할라니까…”

한번쯤은 들어보셨을 유명한 영화 대사죠. 영화 ‘내부자들’에서 나온 이병헌씨 대사인데요. 영화 인기에 힘입어 지금도 SNS엔 몰디브 신혼여행객들이 올린 모히또 인증샷들로 가득합니다. 저도 얼마 전 신혼여행을 다녀왔습니다. 이렇게 모히또 인증샷도 남겼고요. 근데 에메랄드빛 바다는 어디가고 왜 어두컴컴한 뒷골목 배경이냐고요? 몰디브가 아닌 바로 쿠바니까요.

쿠바는 칵테일로 유명합니다. 모히또(mojito)와 다이끼리(daiquiri)가 대표적인데 쿠바가 발상지죠. 둘 다 사탕수수가 원료인 럼주(rum)를 사용하는데요. 쿠바산 사탕수수가 한 땐 세계시장 4분의 1을 차지했을 정도로 유명했습니다. 사탕수수와 함께 쿠바 칵테일도 전 세계로 퍼져나갔죠.

“내 모히또는 라 보데기따(la bodeguita)에,
내 다이끼리는 엘 플로리디따(el floridita)에 있다.”


미국의 대문호이자 애주가였던 어니스트 헤밍웨이. 그가 남겼단 이 한 마디에 두 가게는 전 세계 관광객들로 늘 붐볐습니다.

2012년, 라 보데기따 전(前) 주인 앙헬 마르티네스 씨는 미국 언론매체에 “헤밍웨이는 라 보데기따에 온 적이 없다.”고 밝혔습니다. 마케팅 수단이었단 거죠. 폭탄발언에도 사람들은 개의치 않았습니다. 모히또 맛은 충분히 훌륭했으니까요.

헤밍웨이가 사랑한 나라, 쿠바.
헤밍웨이는 28년간 이 곳에 머물렀습니다. 『노인과 바다』『누구를 위하여 종은 울리나』와 같은 대표 역작들이 여기서 탄생했죠. 아직도 곳곳엔 헤밍웨이의 흔적이 남아 있습니다.

쿠바에 도착한 지 7일째. 그 날도 헤밍웨이의 흔적을 따라가 봤습니다. 찾은 곳은 ‘슬로피 조’. 1917년에 문을 연, 역사가 깊은 곳이죠. 이곳 벽에도 어김없이 헤밍웨이 사진이 걸려 있었습니다.

점심을 마치고 문을 나서니 너무나 친숙한 차 한 대가 보이더군요. 바로 소방차였습니다. 먼 이국땅에서 한국사람을 만난 기분이랄까요. 직업이 직업인지라 반갑게 뛰어갔습니다. 소방차 옆 건물 외벽. 명판을 보는 순간 저도 모르게 헤밍웨이를 외쳤습니다. ‘쿠바 소방박물관’

사실 기대 안 했습니다. 한국을 떠나기 전 쿠바 소방정보를 몇 날 며칠 찾아봤죠. 헛수고였습니다. 공산국가 쿠바를 너무 쉽게 본거죠. 찾은 거라곤 수도 아바나(Habana)가 아닌 마딴사스(Matanzas)란 외곽지역에 소방박물관이 있다는 것. 포기상태였는데 뜻하지 않은 곳에서 만나게 됐습니다. 헤밍웨이가 절 데려다준 격이네요.

그런데 의아했습니다. 명판과 건물 상부에 적힌 글자가 달라서죠. 명판엔 ‘쿠바 소방박물관(Museo de los Bomberos de la Republica de Cuba)’, 상부엔 ‘소방서(Cuartel de Bomberos)’. 알고 보니 그 이유는 따로 있더군요.

그 전에 하나 알려드리겠습니다. 스페인어에서 소방서를 나타내는 단어는 여러 가집니다. 그 중 하나가 Cuartel de Bomberos죠. 사진 속 건물 상부엔 Cvartel로 시작해 철자가 다릅니다. ‘오타가 건물을 망쳤네’라고 저처럼 생각할 수 있겠지만 오타는 아닙니다. 과거 스페인어에선 v를 u로 썼었습니다. 즉, 소리가 모음으로 올자리에 v가 오면 u로 읽어줬었죠. 오타가 아니니 오해하지 마시길.

본론으로 돌아가서, 처음 이 곳은 소방서로 지어졌습니다.
1909년 미국 식민지 시기, 제2대 쿠바총독인 찰스 마군(Charles Magoon)이 건립했죠. 당시 쿠바 소방은 조직적이지 못했습니다. 체계적인 교육과 전문인력 양성이 필요했고요. 쿠바 최초의 소방학교와 구조대가 여기서 탄생하게 됩니다. 2008년까지 소방서로 사용되다 박물관으로 바뀝니다. 소방서일 당시, 이 곳 올드 아바나 지역의 화재를 비롯해 산사태, 홍수 등 재난대응에 큰 역할을 했죠.

이 곳 소방박물관에 꽤 오랜 시간 머물렀습니다. 볼거리도 풍부했고요. 소방차와 물탱크차, 각종 소방시설과 화재진압장비, 각 시대별 제복을 비롯해 화재진압복까지. 거기다 당시 기록사진과 옛 문서 등 하나하나마다 제 이야기가 있더군요. 특히 소방시설과 화재진압장비는 해를 거듭해 더욱 정교해지고 실용적으로 변하는 과정까지 볼 수 있어 재밌었습니다.

한 세기를 고이 간직한 쿠바 소방박물관. 저만 볼 수 있나요. 여러분께 소개합니다.

너무 순식간에 지나가서 뭐가 뭔지 모르시겠죠?
그래서 사진을 준비했습니다. 간단한 설명과 함께 찬찬히 살펴보세요.

이 중 특별한 이야기를 담고 있는 사진 2장이 있습니다.
첫 번째는 이 사진인데요.

제복사진이 당당히 소방박물관에 전시돼 있는 걸 보니 쿠바에 상징적 인물 같죠?
액자 속 주인공, 엔리께따 레예스 곤잘레스(Enriqueta Reyes Gonzalez)란 사람입니다. 라틴아메리카와 쿠바 최초의 여성소방관이죠.
1953년 비야끌라라주(州) 란추엘로시(市) 소방대장(한국의 소방서장 직위)으로 취임했는데 이 또한 여성으로서 최초였습니다.

직위가 오른 후에도 의용소방대 제복 제작과 소방서 건립, 소방차 확보 등 쿠바 소방대를 위해 헌신을 아끼지 않았다 하네요.
1970년 퇴임 후 본인이 나고 자란 란추엘로시(市) 지역사회에 봉사하다 2008년 88세 일기로 세상을 떠났습니다.
기념우표도 제작될 만큼 쿠바사회에 귀감이 되는 소방관이었죠.

두 번째 사진입니다.

여성소방관 같네요. 그런데 하단엔 ‘상인소방대’라고 적혀있습니다. 상인소방대란 명칭이 생소하게 느껴지는데요. 언뜻 보기엔 의용소방대 같지만 다른 개념이었습니다. 나이가 젊은 상업종사자로만 구성된 이 특별한 소방대. 내용은 이렇습니다.

아바나시(市)가 만들어진 스페인 식민지 시절, 불이나면 항상 주민들이 나서야 했습니다. 당시 아바나엔 소방대가 없었거든요. 1835년 12월 12일, 명예노동소방대로 알려진 아바나 소방대가 드디어 창설됩니다. 그로부터 약 40년 후, 아바나에 교역과 상업이 활발해지면서 경제호황기를 맞는데요. 화재도 따라 증가하면서 엄청난 피해를 입게 됩니다. 소방대가 있다 해도 기존 소방력으론 역부족이었습니다.

손해를 많이 본 보험회사들은 불만이 이만저만 아니었습니다. 이런 구실로 보험회사들은 기업주들 지원으로 운영되는 의용소방대 창설을 정부에 강력히 요구하게 되죠. 1873년 2월 26일, 결국 상인소방대(Cuerpo de Bomberos del Comercio) 조직 법안은 승인됩니다. 단 상업에 종사하는 젊은사람들만 소방대 일원이 될 수 있었죠. 이 상인소방대는 쿠바 소방대와 함께 운영되다가 나중엔 의용소방대로 탈바꿈하게 됩니다.

헤밍웨이가 데려다 준 쿠바 소방박물관. 막상 나설려니 너무 아쉬웠습니다. 박물관이 아닌 진짜 소방서에 가고 싶더라고요. 힐끔힐끔 절 쳐다보며 경비를 서던 쿠바 소방관에게 무턱대고 다가갔습니다. 짧게나마 배웠던 스페인어를 총동원해 한 마디 던졌습니다.

“Quiero ir al cuerpo de bomberos(소방서에 가고 싶어요).”

셔터를 마구 눌러대던 동양인이 말까지거니 흠칫 놀라더군요.
제 스페인어를 과대평가해선지 못 알아듣는 단어만 쏙쏙 골라 설명합니다.

“Perdon, no entiendo(죄송하지만, 이해가 안돼요).”

잠시 고민하더니 종이에 약도를 그리기 시작합니다. 동그라미 색칠한 곳이 소방서라 하더군요. 생각보다 가까이 있었습니다. 친절히 골목 앞까지 따라나서며 길을 알려줍니다. 월요일부터 금요일까지, 오전 9시반부터 오후 5시까지 문을 연다고 또 놀러오라 하네요. 고개를 숙여가며 고맙단 말을 수십 번 하고서 돌아서는데, 뒤에서 한 마디 들립니다.

“Chino?(중국사람?)”

쿠바에 도착해서 수백 번을 들은 것 같습니다. 이 정도는 양호한 편입니다. 민박집 동네 애들은 저를 ‘잭키 찬(성룡)’이라 불렀을 정도니까요.

“No, coreano del sur(아니, 한국사람이에요).”라고 씨익 웃으며 돌아섰습니다.

기대감은 부풀대로 부풀어 올랐습니다. 손에 쥔 약도가 마치 보물지도인 마냥 가는 내내 웃음이 끊이질 않더군요. 한 블로거가 찍었던 뜨리니다드 소방서 사진이 갑자기 머릿속에 떠올랐습니다. 이국적인 모습을 상상하며 까삐똘리오 옆을 지나갔습니다.

골목을 도는 순간 소방서 건물이 눈에 들어오자 제 심장은 쿵쾅거리기 시작했습니다.
아바나 제1특수소방대, 드디어 만났습니다.

생각보다 큰 규모에 놀라고, 보초병의 날카로운 시선에 놀랐습니다. 셔터를 연신 누르다 낌새가 이상해 잠깐 멈췄습니다. 시선을 집중시킨 거나 마찬가지죠. 웬 동양인이 다가와 사진을 가리지 않고 찍으니 이목이 집중될 수밖에요.

쿠바는 공산국가입니다. 보안이 철저할 수밖에 없죠. 관광산업이 예전보다 활성화됐다 해도 폐쇄적인 사횐 건 마찬가지입니다. 불심검문은 여전하며 심지어 감시도 이뤄지고 있다 합니다.

쿠바에서 취재를 하려면 공관을 통해 취재비자를 발급받아야 합니다. 정식적인 절차를 밟아 쿠바 정부 감독 하에 진행하게 되죠. 만약 취재비자 없이 진행하다 발각된다면? 어우, 상상도 하기 싫네요. 취재목적 여행은 아니지만 오해받기 딱 좋은 상황인 건 분명했습니다.

웃으며 다가가 말을 건냈습니다.

“Hola, puedes hablar ingles?(안녕하세요, 영어하실 줄 아시나요?)”

머뭇거리더니 급하게 사무실로 들어가 누굴 데려옵니다. 희끗한 머리, 지긋해 보이는 외모, 별이 새겨진 근무복. 딱 봐도 높은 직위의 소방관 같았습니다. 악수를 했습니다. 낯선 스페인어로 질문을 던져옵니다. 스페인어 공부에 소홀했던 제 자신이 안타까웠던 순간이었습니다. 소통할 준비가 안 돼서겠죠.

제 휴대폰에 천천히 본인 이름을 남깁니다. 뻬드로 로렌조(Pedro Lorenzo).
아바나 제1특수소방대 부소방대장(한국의 소방서장 직위)이라 자신을 소개한 그는, 친절하게도 말 한마디 통하지 않는 저와 손짓발짓으로 꽤 오랜 시간 대화를 나눴습니다. 쿠바 소방을 한국에 소개하고 싶다며 팸플릿을 요청했으나 그는 정중히 거절했습니다. 내부 공개는 힘들지만 외부는 얼마든 촬영하라고 배려해준 덕에 소방서를 돌며 이모저모를 살펴볼 수 있었습니다.

자동차 브랜드 전시장을 방불케 한 차량 격납고. 공산국가인 탓에 러시아 KAMAZ, 중국중기에서 만든 HOWO 등 우리에겐 낯선 브랜드의 차들로 가득했었습니다. 특이했던 건 닛산, 미쓰비시 FUSO와 같은 일본차량도 만날 수 있었단 건데 일본 정부에서 ‘공적개발원조’ 명목으로 쿠바에 지원했다 하더군요.

신기하게도 소방서에 극장이 있었습니다. 당당히 이름까지 있는. ‘시로 레돈도’ 극장. 알고 보니 쿠바혁명전사 시로 레돈도를 기념하고자 이름을 따왔다 합니다. 짐작과는 다르게 혁명영화나 게릴라전 영화 외에도 다양한 장르를 상영하더라고요. 쿠바에선 문화생활이 공짜라 누구나 영화와 친해질 수 있습니다. 하지만 문화공간은 여전히 부족한 실정이죠. 소방서 극장처럼 많은 공공시설이 부족한 문화공간을 채우고 있습니다.

얼마 전 쿠바 소방국은 창설 320주년을 맞았습니다. 스페인 식민지 시기부터 이어져 온, 가장 오래된 역사를 가진 기관이죠. 그래서인지 쿠바 소방관들은 자부심이 더 남달랐습니다. 영광의 상처, 화상자국을 자랑스럽게 여기던 이들이었습니다.

낡은 방화복이 자신을 말한다던 로렌조 부소방대장.
제 눈엔 ‘체 게바라’ 만큼이나 훌륭한 쿠바 영웅이었습니다.

소방대 정문 간판에 선명히 적혀있던 이 말을 끝으로 조금은 특별했던 쿠바 소방여행기를 마무리할까 합니다.

“여러 위험 상황 속에서도 화재와 맞서 싸우는
그들의 노력을 우린 잊지 않아야 한다.”
- 쿠바 혁명지도자, 피델 카스트로

참고자료

ecured.cu, bomberos de cuba
articulos.sld.cu, creación del cuerpo de bomberos de cuba
filateliadesdecuba.wordpress.com, otros bomberos de cuba
youtube.com, Cuba, bomberos de cuba
youtube.com, fundación del primer cuerpo de bomberos de Cuba
 

top